좋아하는 詩

행복 - 이정록

효림♡ 2013. 8. 19. 08:34

* 행복 - 이정록   

편지봉투의 소원은

입에 풀칠 한 번 해보는 것이다

 

사나흘 쫄쫄 굶을 글자들아

숨 멈추지 마라, 풀칠하는 순간

까치복어처럼 큰 숨 들이마시는 것이다

한 그릇의 공깃밥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끝내는

풀 마른 그 입술마저 뜯겨버리는 것이다

그대 눈빛과 맞닥뜨리는 것이다 *

 

* 꽃물 고치 
아파트 일층으로 이사와서
생애 처음으로 화단 하나 만들었는데
간밤에 봉숭아 이파리와 꽃을 죄다 훑어갔다
이건 벌레나 새가 뜯어먹은 게 아니다
인간이다 분명 꽃피고 물오르기 기다린 노처녀다
봉숭아 꼬투리처럼 눈꺼풀 치켜뜨고
지나는 여자들의 손을 훔쳐보는데
할머니 한 분 반갑게 인사한다
총각 덕분에 삼십 년 만에 꽃물 들였네
두 손을 활짝 흔들어 보인다
손끝마다 눈부신 고치들
나도 따라 환하게 웃으며 막 부화한
팔순의 나비에게 수컷으로 다가가는데
손가락 끝부터 수의를 짜기 시작한 백발이
봉숭아 꽃 으깨어 목 축이고 있다
아직은 풀어지지도 더 짜지도 마라
광목 실이 매듭으로 묶여 있다 *

 

* 이백 

  원고지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사학년 때다 뭘 써도 좋다 원고지 다섯 장만 채워라! 다락방에 올라 두근두근, 처음으로 원고지라는 걸 펼쳐보니 (10X20)이라 쓰여 있는 게 아닌가? 그럼 답은 200! 구구단을 뗀 지 두어 달, 뭐든 곱하던 때인지라 원고지 칸마다 200이란 숫자를 가득 써냈다 너 같은 놈은 교사생활 삼십년, 개교 이래 처음이라고 교문 밖 초롱산 꼭대기까지 소문이 쫙 퍼졌다 그로부터 십오년, 나는 작가가  되었다 지금도 글이 콱 막힐 때마다, 그 붉은 우물에서 두레박을 타고 이백이 솟아오른다 그때 나는, 이백과 같은 길을 걸어갈 거라는 막연한 운명을 또박또박 적어넣었던 게 아닐까? *

* 이정록시집[정말]-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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