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팽이 - 정호승
집을 등에 지고 가는 그를 밟지 마시라
살짝만 밟아도 으깨지는 그를 그대로 두시라
그는 집을 별이라고 생각하고
별을 가볍다고 생각할 때가 있으므로
서울역 대합실이든 지하철 통로이든
기어가거나 걸어가거나
누구나 가는 길의 끝은 다 눈물의 끝이므로
봄비가 오고 진달래가 피어도 그냥 두시라
그는 배가 고파도 배가 부를 뿐
이미 진 꽃을 다시 지게 할 뿐
기어간 길을 또 기어갈 뿐
그래도 어머니는 그에게 기어가는 자유와
가끔 밤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주셨으니
비록 여름에 밭을 갈고
가을에 씨를 뿌린다 할지라도
밟지 마시라
봄비에 젖은 집을 등에 지고 술 취해
비틀비틀 기어간다 할지라도 *
* 정호승시집[여행]-창비
* 달팽이
비가 온다
봄비다
우산도 없이
한참 길을 걷는다
뒤에서 누가
말없이
우산을 받쳐준다
문득 뒤돌아보니
달팽이다 *
* 달팽이
이슬비 그친 뒤
양재천에 가서 달리기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달팽이를 밟아버렸다
내 발에 밟힐 때
온 몸이 으깨어지면서
달팽이는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나를 원망했을까
나는 달팽이한테 너무 너무 미안해서
자정이 넘도록
기어나오지 말라고 해도 자꾸
기어나오는 달팽이들을
일일이 손으로 집어
수풀 속으로 던져주었다
* 달팽이
내 마음은 연약하나 껍질은 단단하다
내 껍질은 연약하나 마음은 단단하다
사람들이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듯이
달팽이도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
이제 막 기울기 시작한 달은 차돌같이 차다
나의 길은 어느새 풀잎에 젖어 있다
손에 주전자를 들고 아침이슬을 밟으며
내가 가야 할 길 앞에서 누가 오고 있다
죄없는 소년이다
소년이 무심코 나를 밟고 간다
아마 아침이슬인 줄 알았나 보다 *
* 달팽이에게
혼자 가지 마세요
지금 천국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자리 하나는
당신이 차지하시고
그 곁에 풀 한 포기 자랄 수 있는 자리 하나
마련해주세요
나도 데리고 가세요
내 비록 있는 그대로 하루를 보낸 적 없어
있는 그대로 보낸 하루가
천국에서 보낸 하루와 같은 지 알 수 없으나
그저 당신 곁에서
묵묵히 듣고 있겠어요
천국에 가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말해야 할 때
당신이 어느 순간 말하는 지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겠어요 *
* 정호승시집[밥값]-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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