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여행 - 정호승

효림♡ 2013. 11. 4. 08:19

* 여행 - 정호승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 *

 

* 산수유에게

늙어가는 아버지를 용서하라
너는 봄이 오지 않아도 꽃으로 피어나지만
나는 봄이 와도 꽃으로 피어나지 않는다
봄이 가도 꽃잎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내 평생 꽃으로 피어나는 사람을 아름다워했으나
이제는 사람이 꽃으로 피어나길 바라지 않는다

사람이 꽃처럼 열매 맺길 바라지 않는다
늙어간다고 사랑을 잃겠느냐
늙어간다고 사랑도 늙겠느냐 *
 

* 성체조배

꽃이 물을 만나

물의 꽃이 되듯

물이 꽃을 만나

꽃의 물이 되듯

 

밤하늘이 별을 만나

별의 밤하늘이 되듯

별이 밤하늘을 만나

밤하늘의 별이 되듯

 

내가 당신을 만나

당신의 내가 되듯

당신이 나를 만나

나의 당신이 되듯 *

 

* 지푸라기

나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게 아니다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 따라 떠도는 게 아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이다

내일도 슬퍼하고 오늘도 슬퍼하는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당신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다

물과 바람과 맑은 햇살과

새소리가 섞인 진흙이 되어

허물어진 당신의 집을 다시 짓는

단단한 흙벽돌이 되길 바랄 뿐이다 *

 

* 바람의 묵비

나는 운주사를 지나며 대웅전 풍경 소리를 울렸을 뿐

가끔 당신의 마음속 닫힌 문을 두드리는 문소리를 크게 내었을 뿐

당신이 타고 가는 기차가 단양철교 위를 지날 때

기차 지붕 위에 올라가 가끔 남한강 물결 소리를 내었을 뿐

한번은 목포항을 떠나는 당신의 뱃고동 소리에 천천히 손수건을 흔들었을 뿐

묻지 마라 왜 사랑하느냐고 다시는 묻지 마라

바람인 나는 혀가 없다 *

 

* 슬픔의 나무

살아서는 그 나무에 가지 못하네

그 나무 그늘에 앉아 평생 쉬지 못하네

그 나무에 핀 붉은 꽃도 바라보지 못하고

그 나무의 작은 열매도 먹지 못하네

내 한마리 도요새가 되어 멀리 날아가도

그 나무 가지 위에는 결코 앉지 못하네

나는 기다릴 수 없는 기다림을 기다려야 하고

용서할 수 없는 용서를 용서해야 하고

분노에 휩싸이면 죽은 사람처럼 죽어야 하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다 받아들여야 하네

그래야만 죽어서는 그 나무에 갈 수 있다네

살아 있을 때 짊어진 모든 슬픔을

그 나무 가지에 매달아놓고 떠나갈 수 있다네 *

 

* 정호승시집[여행]-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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