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의 노래 - 이기철
옴 돋는 나무들은 나를 황홀하게 한다.
흙 속에서 초록이 돋아나는 걸 보면 경건해진다.
삭은 처마 아래 내일 시집 갈 처녀가 신부의 꿈을 꾸고
녹슨 대문 안에 햇빛처럼 밝은 아이가 잠에서 깨어난다.
사람의 이름과 함께 생애을 살고
풀잎의 이름으로 시를 쓴다
세상의 것 다 녹슬었다고 핍박하는 것 아직 이르다
어는 산 기슭에 샘물이 솟고
들판 가운데 풀꽃이 씨를 익힌다.
절망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지레 절망을 노래하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꽃잎 하나씩은 지니고 산다.
근심이 비단이 되는 하루, 상처가 보석이 되는 한 해를
노래할 수 있다면
햇살의 은실 풀어 내 아는 사람들에게
금박 입혀 보내고 싶다.
내 열 줄 시가 아니면 무슨 말로
손수건만한 생애가 소중함을 노래하리
초록에서 숨쉬고 순금의 햇빛에서 일하는
생의 향기를 흰 종이 위에 조심히 쓰며.
* 생은 과일처럼 익는다 - 이기철 | |
향기는 둥치 안에 숨었다가 조금씩 우리의 코에 스민다 맨발로 밟으면 풀잎은 음악 소리를 낸다 사람 아니면 누구에게 그립다는 말을 전할까 불빛으로 남은 이름이 내 생의 핏줄이다 하루를 태우고 남은 빛이 별이 될 때 어둡지 않으려고 마음과 집들은 함께 모여 있다 어느 별에 살다가 내게로 온 생이여 내 생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구나 나무가 팔을 벋어 다른 나무를 껴안는다 사람은 마음을 벋어 타인을 껴안는다 어느 가슴이 그립다는 말을 발명했을까 공중에도 푸른 하루가 살듯이 내 시에는 사람의 이름이 살고 있다 붉은 옷 한 벌 해지면 떠나갈 꽃들처럼 그렇게는 내게 온 생을 떠나보낼 수 없다 귀빈이여, 생이라는 새 이파리여 네가 있어 삶은 과일처럼 익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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