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꽃 찢고 열매 나오듯 - 장옥관

효림♡ 2014. 1. 7. 22:00

* 꽃 찢고 열매 나오듯 - 장옥관 

싸락눈이 문풍지를 때리고 있었다
시렁에 매달린 메주가 익어가던 안방 아랫목에는 갓 탯줄 끊은 동생이 포대기에 싸인 채 고구마처럼 새근거리고 있었다
비릿한 배내옷에 코를 박으며 나는 물었다
―엄마, 나는 어디서 왔나요
웅얼웅얼 말이 나오기 전에 쩡, 쩡 마을 못이 몸 트는 소리 들려왔다
천년 전에 죽은 내가 물었다
―꽃 찢고 열매 나오듯이 여기 왔나요 사슴 삼킨 사자 아가리를 찢고 나는 여기 왔나요
입술을 채 떼기 전에 마당에 묻어놓은 김장독 배 부푸는 소리 들려왔다
말라붙은 빈 젖을 움켜쥐며 천년 뒤에 태어날 내가 말했다
―얼어붙은 못물이 새를 삼키는 걸 봤어요 메아리가 메아리를 잡아먹는 소리 나는 들었어요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미역줄기 같은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얘야, 두려워 마라 저 소리는 항아리에 든 아기가 익어가는 소리란다
휘익, 휘익 호랑지빠귀 그림자가 마당을 뒤덮고 대청 기둥이 부푼 내 안고 식은땀 흘리던 그 동짓밤
썰물이 빠져나간 어머니의 음문으로
묵은 밤을 찢은
새해의 빛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 달의 뒤편

등 긁을 때 아무리 용 써도 손 닿지 않는 곳이 있다 경상도 사람인 내가 읽을 수는 있어도 발음할 수 없는 시니피앙 ‘어’와 ‘으’, 달의 뒤편이다 천수관음처럼 손바닥에 눈알 붙이지 않는 한 볼 수 없는 내 얼굴, 달의 뒤편이다 물고문 전기고문 꼬챙이에 꿰어 돌려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 더듬이 떼고 날개 떼어 구워 먹을 수는 있어도 빼앗을 수 없는 귀뚜라미 울음 같은 것, 내 눈동자의 뒤편이다. *

 

* 잃어버린 열쇠  
누가 잃어버린 것일까
풀밭에 버려진 녹슨 열쇠
누가 이 초록을 열어보려 했던 것일까
누가 이 봉쇄수도원을 두드렸을까
차가운 촛농으로 오래된 사원
수런수런 연두빛 입술들이 피워 올리는 기도문
개미들이 하늘과 땅을 꿰매고 있다
아, 저기 호두껍질을 뒤집어쓴 사람이 걸어오고 있다
風炳든 그의 암호, 누구도 열 수 없다

 

* 염산(鹽山)에서 

왕소금에 썩썩 썰은 돼지고기 몇 점
소금포대 나르다 새참 먹는 일꾼들 틈에 끼여
공으로 얻어먹는 탁주 한 사발
오리들이 뒤뚱대며 길을 건너고 있다
어질머리 붉은 해가 섯등* 갇힌 바다에 빠져든다
길 옆 논에는 불을 뿜는 싯푸른 볏잎들
바다는 멀어도 고기떼 지나는 소리 잘 들린다 *

*섯등: 염전에서 소금을 만들 때 바닷물을 거르기 위해 둘러막은 장치.

 

* 내 배꼽을 만져 보았다 
사과 꼭지는
꽃이 달렸던 자리

사과의 배꼽이다

사과를 먹다가 슬쩍,
내 배꼽을 만져 보았다

엄마 가지에 매달렸던
꼭지

얌전하게 매듭 하나
물고 있다

 

* 낙동 가는 길

  낙동을 가려면 선산에서 910호 지방도를 타야 한다. 불 꺼진
백양나무 가로수를 지나야 한다. 단밀로 가는 낙단교 건너

않아야 한다. 쌍용 주유소 갈림길 지나 공원묘지 위를 연사흘

흩뿌리는 눈발. 낙동 가면 무엇이 있나, 고드름 달린 왜식倭式

목조 이층 목화다방과  덜컹대는 유리미닫이 약방의 낡은 처방

전. 밤 아홉시에  벌써 버스는 끊기고, 싸락눈이 갈기 세워 골목

을 누빈다. 산림계 면서기는 잠에  곯아떨어졌는지 아까부터 

직실 불이 꺼져 있다. 다닥다닥  이마 낮춘 처마 모퉁이 점두店頭. 

중 늙은이 서넛 둘러앉아 소주를 마시고 어둠이 웅크리고 있는 

벌판. 저 너머 소리없는 눈발이 외딴 집의 불빛을 달래고 있다. 

한 사흘 낙동에 눈이 내리면 꺼진 집은 봉분같이 고루 편안하고, 

두문불출杜門不出 오리나무도 산을 내려오지 않는다. 

눈 내려 적막한 마을의 근심. 길은 끊기고 눈 아래 한숨은 다시 

한됫박 눈발 치솟게 하는데 낙동은 이미 너무 흔한 곳. 낙동을

가려면 누구나 길 끊긴 눈밭을 지나 백양나무 환한 둥치를

거쳐야 한다. *

 

* 장옥관시인

1955년 경북 선산 출생

1987년 [세계의문학] 등단, 2004년 김달진문학상, 2007년 일연문학상

시집 [황금 연못]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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