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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天路歷程), 혹은 -사랑, 그 잦은 한 잎 - 김정웅

효림♡ 2014. 4. 26. 17:27

*천로역정(天路歷程), 혹은 -사랑, 그 잦은 한 잎  - 김정웅

 

꽃은 온갖 빛깔과 향기로 다투듯이 곱고

잎은 초록 한 가지로 오직 편안하니

 

꽃은

일찍 시들며

일찍 시들매 그 모습 더욱 가련코

마음 서럽고 서글플지나

 

잎은

늦서리 나중에 맞고 또 맞으며

비로써 홍황(紅黃)으로 어슷비슷 물드니

가지 끝마다

지는 뒷모습 또한 고요한데

 

그 누가 저들의 일생(一生)을 두고서

꽃과 잎

그 어느 쪽이

더 아름답다, 함부로 말할 수 있으랴. *

 

 

*천로역정(天路歷程), 혹은 -바람이 이는 까닭은 - 김정웅

 

물기 잔잔한 가슴도 어느 땐 불쑥
못 견디게 활활 불길이 일고
그날은 어김없이 세찬 바람이 또 일고
그 바람결에 떠밀려서 내 가는 곳
내 몸 가는 곳이지만 어찌 알 수가 있나요?

어딘가 생각 없이 마구 달려가다간
이유 없이 택시를 급히 잡아타고선
어이없이 어느 역사(驛舍)에 무작정 앉았다간
다시 돌아나와선 휘적휘적 걷다가
문득, 슬며시 사라지는 바람.......

어디에서 싱겁게 술 취해 잠드는지
그러다간 어느 때고 또 잠 깨어나면
어지러운 머리를 획 돌려세워
뜻 모를 산꼭대기로 산꼭대기로
회오리쳐 몇 바퀴 미친 듯이 맴돌다가
곧장, 거북이 잔등 같은 우리 집
낡은 지붕 밑으로
달려오는 그 마음 내 알 수가 있나요?

물오른 생솔가지도 비비적거려
그 물기도 끝끝내 불질러서는
흙 속으로 하늘로 되돌려 보내는
동남방 그 바람의 짓궂은 마음,
그 마음을 내 어찌 알 수가 있나요?

그러나 한 가지 짐작되는 건
바람은 제 몸뚱일 흔들기 위해
솔가지도 흔들고 나도 흔들어 보는 거라.
사람 눈엔 보이지 않는 몸일지라도
이따금씩 제 몸뚱이도 내보이고 싶어
살아 있다는 걸 사람에게 보이고 싶어서
귀찮게 남의 단잠도
흔들어 깨우는 것일 거라. *

 

*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