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물맛 - 장석남

효림♡ 2014. 9. 25. 18:33

* 물맛 - 장석남

물맛을 차차 알아간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맨발인,

 

다 싫고 냉수나 한 사발 마시고 싶은 때

잦다

 

오르막 끝나 땀 훔치고 이제

내리닫이, 그 언덕 보리밭 바람 같은,

 

손뼉 치며 감탄할 것 없이 그저

속에서 훤칠하게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그 걸음걸이

 

내 것으로도 몰래 익혀서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랑에도 죽음에도

써먹어야 할

훤칠한

물맛 *

 

* 뺨의 도둑

  나는 그녀의 분홍 뺨에 난 창을 열고 손을 넣어 자물쇠를

풀고 땅거미와 함께 들어가 가슴을 훔치고 심장을 훔치고 

허벅지와 도톰한  아랫배를 훔치고 불두덩을 훔치고 간과

허파를 훔쳤다 허나 날이 새는데도 너무 많이 훔치는 바람에

그만 다 지고 나올 수가 없었다 이번엔 그녀가 나의 붉은 

뺨을 열고 들어왔다 봄비처럼 그녀의 손이 쓰윽 들어왔다

나는 두 다리가 모두 풀려 연못물이 되어 그녀의 뺨이나

비추며 고요히 고요히 파문을 기다렸다 *

 

* 장석남시집[뺨에 서쪽을 빛내다]-창비,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