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맛 - 장석남
물맛을 차차 알아간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맨발인,
다 싫고 냉수나 한 사발 마시고 싶은 때
잦다
오르막 끝나 땀 훔치고 이제
내리닫이, 그 언덕 보리밭 바람 같은,
손뼉 치며 감탄할 것 없이 그저
속에서 훤칠하게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그 걸음걸이
내 것으로도 몰래 익혀서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랑에도 죽음에도
써먹어야 할
훤칠한
물맛 *
* 뺨의 도둑
나는 그녀의 분홍 뺨에 난 창을 열고 손을 넣어 자물쇠를
풀고 땅거미와 함께 들어가 가슴을 훔치고 심장을 훔치고
허벅지와 도톰한 아랫배를 훔치고 불두덩을 훔치고 간과
허파를 훔쳤다 허나 날이 새는데도 너무 많이 훔치는 바람에
그만 다 지고 나올 수가 없었다 이번엔 그녀가 나의 붉은
뺨을 열고 들어왔다 봄비처럼 그녀의 손이 쓰윽 들어왔다
나는 두 다리가 모두 풀려 연못물이 되어 그녀의 뺨이나
비추며 고요히 고요히 파문을 기다렸다 *
* 장석남시집[뺨에 서쪽을 빛내다]-창비,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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