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새떼를 베끼다 - 위선환

효림♡ 2014. 9. 26. 09:00

* 새떼를 베끼다 - 위선환 

새떼가 오가는 철이라고 쓴다 새떼 하나는 날아오고 새떼 하나는 날아간다고, 거기가 공중이다, 라고 쓴다


두 새떼가 마주보고 날아서, 곧장 맞부닥뜨려서, 부리를, 이마를, 가슴뼈를, 죽지를, 부딪친다고 쓴다


맞부딪친 새들끼리 관통해서 새가 새에게 뚫린다고 쓴다


새떼는 새떼끼리 관통한다고 쓴다 이미 뚫고 나갔다고, 날아가는 새떼끼리는 서로 돌아다본다고 쓴다


새도 새떼도 고스란하다고, 구멍 난 새 한 마리 없고, 살점 하나, 잔뼈 한 조각, 날갯깃 한 개, 떨어지지 않았다고 쓴다


공중에서는 새의 몸이 빈다고, 새떼도 큰 몸이 빈다고, 빈 몸들끼리 뚫렸다고, 그러므로 空中이다, 라고 쓴다 *

 

* 새의 길

새가 어떻게 날아오르는지 어떻게

눈 덮인 들녘을 건너가는지 놀빛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지

짐작했겠지만

공중에서 거침이 없는 새는 오직 날 뿐 따로

길을 내지 않는다

엉뚱하게도

인적 끊긴 들길을 오래 걸은

눈자위가 마른 사람이 손가락을 세워서

저만치

빈 공중의 너머에 걸려 있는

날갯깃도 몇 개 떨어져 있는 새의 길을

가리켜 보이지만 *

 

* 가락지

  하늘 비친 연못입니다. 물방개가 맴을 돕니다.  수면이 동그랗게 파입니다. 빈 가락지 같습니다.

작지만 동그란 한 하늘일 듯, 갸웃하게 해오리가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들여다본 지는 오래 되었고,

해오리가 마릅니다. 바짝 마릅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나를 봅니다. 눈두덩 밑이 텅 비었습니다. *

 

* 손바닥

  관악산 연주암에는 千手觀音像이 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이 불상은 나뭇가지 같은 천 개의 팔과 나무잎사귀 같은

천 개의 손을 가졌으되, 천 개의 나뭇가지를 흔들던 바람결이나 천 개의 나무 잎사귀를 적시던 이슬방울은커녕

그렇거니 짐작할 만한 시늉 하나도 들고 있지 않다. 천 개나 되는 손으로 받쳐 든 것은 천 개나 되는 빈 손바닥이다. *


* 휨

나무가 팔을 구부려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의 어깨를 짚어줄 때

더듬대며 걷다가 멎어선 사람이 어두워지고
나무는 길을 비추며 등불을 들고 올 때

가지는 휘인다

별빛이 새벽까지 얹혀 있거나  
이슬이 방울져 매달리거나 그사이 풋열매가
단단해졌거나 바람의 가랑이가 한낮에 걸렸거나 하늘이

살집 좋은 엉덩이를 깔며 걸터앉거나 또는
제 혼불을 입에 문 다리 긴 거미가
줄을 걸고 공중으로 걸어 내리거나
하는
가지가 휘이는 일들이
더러 없겠는가, 마는

그런 일도 다른 일도 아니고

오래전에 휘어서 이미 적막해진 한 가지가
저런,
다 삭은 제 허리께를 휘청, 휘었다 해서
자칫 꺾일 뻔했다, 나무랄 일 아니다

박새처럼
작고 발목이 가는 새가 날아와, 방금
저기, 높은 가지에
내려앉은 때처럼 *

 

* 소리
마른 풀이 발목을 감고 길이 외지고 멀었다 가을걷이가 늦었다

수수목은 무겁게 숙이었고 서릿발에 찔린 수수목대는 비틀렸다

거머쥐고 꺾자 뚝 하늘의 한쪽에서 목뼈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수수잎이 설레고 나부낄 때에도 정작 서걱댄 것은 저 하늘이다 *

 

* 천수만

저물 때 닿아서 새떼가 공중선회하는 것 본다

 

어두워졌고 

 

새들, 수만 마리가 한꺼번에 새까맣게 쏟아졌고

 

하늘 구멍에 둥글게 달빛 찼고

 

빈 내가 웅크렸다 춥다

 

갯돈 바닥을 허비는 새떼의

 

발톱과 부리 끝에 달빛 묻어나는,

 

무너진 서까래 밑같이 어둔 내 가슴 밑바닥에

 

잿불 일듯 불티 날고

 

잔 불빛 깔리는 때다

 

거기서 돋는 불빛이 저기보다 멀다 *

 

* 화석

지층이 뚝, 잘려나간 해남반도 끝에다 귀를 가져다
대면 느리게 길게 날개 젓는 소래가 들린다. 공룡 여
러 마리가 해안에 깔린 너른 바위 바닥에 발목이 빠
지면서 물 고인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그때는
새가 돌 속을 날았다.

 

* 혼잣말   

나는 더디고 햇살은 빨랐으므로 몇 해째나 가을은 나보다 먼저 저물었다

 

땅거미를 덮으며 어둠이 쌓이고 사람들은 돌아가 불을 켜서 내걸 무렵 나는 늦게 닿아서 두리번거리다 깜깜해졌던,

 

그렇게 깜깜해진 여러 해 뒤이므로

 

저문 길에 잠깐 젖던 가는 빗발과 젖은 흙을 베고 눕던 지푸라기 몇 낱과 가지 끝에서 빛나던 고추색 놀빛과 들녘 끝으로 끌려가던 물소리까지, 그것들은 지금쯤 어디 모여 있겠는가

 

그것들 아니고 무엇이 하늘의 푸른빛을 차고 깊게 했겠는가

 

하늘 아래로 걸어가는 길이 참 조용하다

 

사람의 걸음걸이로 여기까지 걸어왔구나 더디게 오래 걸어서 이제야 닿는구나 목소리를 낮추어 혼잣말하듯이 *

 

* 위선환시집[새떼를 베끼다]-문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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