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금 - 김기림
심장을 잃어버린 토끼는
지금 어디 가서 마른 풀을 베고 낮잠을 잘까? *
* 어, 석류가 익었네 - 정유화
석류네 집 창문이 열리자 알알이 영글은 석류알들의 눈빛이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윤기가 반들반들하게 빛나던지 그 눈망울 보기 위해 나뭇가지로 오르던 나의 마음도 가다 말고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석류네 집 창문에는 한 다발의 이야기가 동그랗게 매달려 있습니다. 석류네 집으로 이사를 한번 가 보고 싶습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재미나는 이야기가 없는 이 아파트 골목을 떠나 몸만 챙겨서 이사하고 싶었습니다. 발을 들여놓을 자리라도 없다면 문간방이라도 얻어 가을 한철을 월세로 살아 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석류알 가족 중에서 어느 한 놈이 철없이 집을 뛰쳐나가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 재미를 지어낼 줄 아는 호젓한 그리움의 시간입니다. *
* 은현리 달력 -인디언 달력을 흉내 내어 - 정일근
1월, 은현리에 봄까치꽃 맨 처음 피는 달
2월, 철새 까마귀 떼 시베리아로 돌아가는 달
3월, 엄나무 단단한 가시 가시 물올라 스스로 붉어지는 달
4월, 벚나무 아래 앉아 연필로 밑줄 치며 그리운 시집 읽는 달
5월, 내 꽃밭으로 백모란 찾아오시는 달
6월, 새벽에 감꽃 주워 그대 목걸이를 만드는 달
7월, 밤마다 은현리 개구리 합창단이 공연하는 달
8월, 대운산 넘어 동해 바다로 마구 달려가고 싶은 달
9월, 맨발로 맨발로 무제치늪 걸어 보는 달
10월, 은현리 산길 들길에서 쑥부쟁이 꽃 만나는 달
11월, 늙으신 어머니 곁에서 함께 자는 달
12월, 얼음 어는 밤 잠들지 못하여 그 사람 생각하는 달 *
* 정일근시집[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 흔적 - 조향미
온 줄도 몰랐는데
모기 한 마리가 팔 위에 앉았다
반사적으로 내리쳤다
도망쳤던가 죽었던가 하여간
앉았던 자리 살이 간질거리며 부풀어 올랐다
물린 자국이 그 작은 몸집의 몇십 배는 되겠다
손가락으로 긁적거리다가 손톱으로 꼭꼭 누르다가
물린 팔뚝을 가만히 바라본다
당연하지 않은가
한 존재의 흔적이 이만큼도 안 될 수 있으랴 *
* 조향미시집[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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