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동판매기 - 최승호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는 게
커피가 쏟아지는 버튼을 눌러버렸다
습관의 무서움이다
무서운 습관이 나를 끌고 다닌다
최면술사 같은 습관이
몽유병자 같은 나를
습관 또 습관의 안개나라로 끌고 다닌다
정신 좀 차려야지
고정관념으로 굳어가는 머리의
자욱한 안개를 걷으며
자, 차린다, 이제 나는 뜻밖의 커피를 마시며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매춘부(賣春婦)라 불러도 되겠다
황금(黃金)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그대가 돈의 권능(權能)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그러면 매음(賣淫)의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십자가(十字架)를 세운 자동판매기는
신(神)의 오렌지 주스를 줄 것인가 *
* 조명된 남자
그늘 없는 곳이 사막이라고
중얼거리는 서울의 햇빛
무교동에서 보았다 공 치는 남자
뙤약볕 속에 공 치는 남자를
배꼽에
긴 고무줄이 달린 공은
치면 고무줄이 늘어나서 허공으로 날아갔다
다시 날아왔다 공은
일거리는
치면 허공으로 날아갔다
다시 탄력 있게 날아왔다
뙤약볕 속에 뻘뻘 땀을 흘리며
라켓을 쥐고 공 치는 남자의
말없는 동작은
지루하고 외롭게 반복되고
배꼽에 긴 고무줄을 단 테니스 공은
잘 팔리지 않았다
저렇게 열심인 노동의 대가가 없어서야
공 치는 직업의 남자는
정말 공치는 남자라고
시간이 늘어났다 줄어드는 고무줄의 선들로 메워진다고
중얼거리는 서울의 햇살 아래
* 최승호시집[고슴도치의 마을]-문학과지성사,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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