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칸나 - 이윤학

효림♡ 2014. 10. 31. 09:00

* 칸나 - 이윤학 

숭례초등학교 정문 쪽 담 밑에는

오늘도 세 그루 칸나가

그을음 없는 불을 밝히고 있다.

 

며칠씩 장맛비 내리고

칸나 불은 붉고 끝이 뾰족해

이 세상에서 처음 만나는

새싹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장맛비 내리기 전에

몇 달 동안,

할머니 한 분이 앉아 있었다.

광목 잡곡 자루들

골목길에 늘어놓고 앉아 있었다.

됫박에 소복이 잡곡을 담아놓고

담에 뒷머리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성큼성큼 비둘기들 다가와서

광목 잡곡 자루를 축내고 있었다.

하현달 모양 모자 차양

꾹 눌러쓴 할머니 한 분

담에 뒷머리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세상 좋은 공기 혼자 다 잡숫고 있었다.,

앞에 놓인 잡곡들 다 뿌려진

드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 벌린 채 깊은 잠들어 있었다.

 

세 그루 칸나 꽃이

세상에 나오기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

 

* 칸나 - 오규원

칸나가 처음 꽃이 핀 날은

신문이 오지 않았다

대신 한 마리 잠자리가 날아와

꽃 위를 맴돌았다

칸나가 꽃대를 더 위로

뽑아올리고 다시

꽃이 핀 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음날 오후 소나기가

한동안 퍼부었다 *

 

* 칸나 - 최승호 

칸나에 대해 쓰고 싶었다. 제주도의 여름, 현무암 돌담 아래 피어 있던 칸나, 그 붉은 꽃을 본 후로 칸나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쓸 수 없었다. 어쩌면 오늘도 쓰려고 애쓰다가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칸나인 것처럼 쓰고 싶었다. 칸나 속으로 들어가서 칸도 없고 나도 없는 칸나의 마음으로 말이다. 칸나! 칸나는 말의 저편에 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글이 이렇게 갑자기 벽에 부딪힐 때가 있다

칸나에 대해 쓰고 싶었다. 제주도의 여름, 붉은 칸나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그날, 무슨 일인지 내 혓바닥은 고름들로 퉁퉁 부어올라 있는 상태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나는 칸나를 보고 있었다. 시커먼 화산재들이 치솟고 뜨거운 용암들이 흘러넘치는 한라산 밑에서 나는 꽃 붉은 칸나를 보고 있었다

이제는 굳어버린 불의 돌, 현무암, 그 거무스름한 돌담 아래 피어 있던 칸나의 붉은 꽃, 오늘도 칸나에 대해 제대로 쓰지 못한 느낌이 든다. 다음에는 칸나에 대해 더 잘 쓸 수도 있겠지 *

 

* 칸나 - 이문재

따뜻하게 헤어지는 일이 큰일이다

그리움이 적막함으로 옮겨 간다

여름은 숨 가뿐데, 그래

그리워하지 말기로 하자, 다만 한두 번쯤

미워할 힘만 남겨 두기로 하자

 

저 고요하지만 강렬한 반란

덥지만 검은 땅속 뿌리에 대한

가장 붉은 배반, 칸나

 

가볍게 헤어지는 일이 큰일이다

미워할 힘으로 남겨 둔

그날 너의 얼굴빛이 심상치 않다

내 혀, 나의 손가락들 언제

나를 거역할 것인지

 

내 이 몸 구석구석 붉어 간다


* 칸나꽃밭 - 도종환

가장 화려한 꽃이
가장 처참하게 진다

네 사랑을 보아라
네 사랑의 밀물진 꽃밭
서서 보아라

절정에 이르렀던 날의 추억이
너를 더 아프게 하리라 칸나꽃밭 *

 

* 칸나 - 송찬호  

드럼통 반 잘라 엎어놓고 칸나는 여기서 노래를 하였소

초록 기타 하나 들고 동전통 앞에 놓고

가다 멈춰 듣는 이 없어도 언제나

발갛게 목이 부어 있는 칸나

그의 로드 매니저 여행용 가방은

처마 아래에서 저렇게 비에 젖어 울고 있는데

 

그리고 칸나는 해질 녘이면 이곳 창가에 앉아

가끔씩 몽롱 한 잔씩을 마셨소

몸은 이미 저리 붉어

저녁노을로 타닥타닥 타고 있는데

 

박차가 달린 무거운 쇠구두를 신고 칸나는

세월의 말잔등을 때렸소

삼나무 숲이 휙휙 지나가버렸소

초록 기타가 히히힝, 하고 울었소

청춘도 진작에 담을 넘어 달아나버렸소

삼류 인생들은 저렇게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초로(初老)를 맞는 법이오

 

여기 잠시 칸나가 있었소

이 드럼통 화분에 잠시 칸나가 있다 떠났소

아무도 모르게 하룻밤 노루의 피가 자고 간 칸나의 붉은 아침이 있었소  

* 송찬호시집[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지,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