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정전 - 윤재철

효림♡ 2014. 11. 24. 16:39

* 정전 - 윤재철
교무실이 갑자기 정전이 되고
컴퓨터가 모두 꺼지니
금방 전기가 다시 들어오려나
얼마쯤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선생님들이
하나둘 일어서더니
서로에게 다가가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더러는 손발 움직이며 맨손체조도 하고
그러고는 미안한 듯이
컴퓨터 때문에 대화가 많이 없어졌다는 말을 합니다

칸막이 된 책상에 앉아
불 나간 컴퓨터 회색 화면을 오래도록 지켜보면서
문득 가슴이 밀물지듯 먹먹해져 옵니다
사람이 그립습니다
이십오 년 만에 만난 제자는
만나자마자 제게 맞은 따귀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반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따귀를 때리고
선생님이 오히려 울먹거렸다던 그 따귀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은 그 따귀 때문에
자신 살아났다던 얘기를 했습니다
깡패 양아치로 결국은 퇴학을 맞았던 그 녀석이
철학박사가 되어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사람이 그립습니다
따귀도 그립고
주전자로 넘치게 따라 붓던 막걸리도 그립습니다
몸으로 부딪치며 울던 일이 그립습니다
그렇게 정전은 길어지고
침묵 또한 길어지면서
이상하게 창밖은 더욱 밝아집니다
화단 키 작은 벚나무 붉은 낙엽 떨어지는 것이
슬로우 비디오로 길게 눈에 걸립니다 *

 

저무는 들녘에 서서 

빈 들녘에 와서 비로소

사랑이 어떻게 가버렸는가를 본다.

겨울새들은 오고

마른 풀들은 바람에 몸을 눕히는데

떠돌다 지친 몸으로

비로소 하늘을 본다.

가을이 지나가는 하늘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데

타오르던 여름은또 어떻게 지나갔는가

빈 들녘에 서면

아무것도 떠나지 않았는데

나는 떠나고 없다.

사랑이라도 온몸으로 세우지 못한 사랑이

어떻게 속절없이 가버렸는가를

저무는 들녘을 바람만이 일어서고 있었다. *

* 윤재철시집[그래 우리가 만난다면]-창비,1992

 

*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술값은 재들이 낼 거야

옆 자리 앉은 친구가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그때 나는 무슨 계시처럼

죽음을 떠올리고 빙긋이 웃는다

그래 죽을 때도 그러자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화장실 가서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빗돌을 세우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왁자지껄한 잡답 속을 치기배처럼

한 건 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면 돼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외로워지는 연습

술집을 빠져나와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걸으며

마음이 비로소 환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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