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슬픔으로 가는 길 - 정호승

효림♡ 2015. 2. 13. 08:30

* 슬픔으로 가는 길 - 정호승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

 

* 슬픔이 기쁨에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 슬픔을 위하여 

슬픔을 위하여
슬픔을 이야기하지 말라

오히려 슬픔의 새벽에 관하여 말하라
첫아이를 사산한 그 여인에 대하여 기도하고
불빛 없는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그 청년의 애인을 위하여 기도하라
슬픔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의
새벽은 언제나 별들로 가득하다

나는 오늘 새벽, 슬픔으로 가는길을 홀로 걸으며
평등과 화해에 대하여 기도하다가
슬픔이 눈물이 아니라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저 새벽별이 질 때까지
슬픔의 상처를 어루만지지 말라
우리가 슬픔을 사랑하기까지는

슬픔이 우리들을 완성하기까지는
슬픔으로 가는 새벽길을 걸으며 기도하라
슬픔의 어머니를 만나 기도하라 *

 

* 슬픔의 나무

살아서는 그 나무에 가지 못하네

그 나무 그늘에 앉아 평생 쉬지 못하네

그 나무에 핀 붉은 꽃도 바라보지 못하고

그 나무의 작은 열매도 먹지 못하네

내 한마리 도요새가 되어 멀리 날아가도

그 나무 가지 위에는 결코 앉지 못하네

나는 기다릴 수 없는 기다림을 기다려야 하고

용서할 수 없는 용서를 용서해야 하고

분노에 휩싸이면 죽은 사람처럼 죽어야 하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다 받아들여야 하네

그래야만 죽어서는 그 나무에 갈 수 있다네

살아 있을 때 짊어진 모든 슬픔을

그 나무 가지에 매달아놓고 떠나갈 수 있다네 *

 

* 정호승시선집[내가 사랑하는 사람]-열림원, 2014

'정호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한강에서 - 정호승   (0) 2015.02.23
서울의 예수 - 정호승   (0) 2015.02.16
자작나무에게 - 정호승   (0) 2015.01.06
[스크랩] 꽃...정호승  (0) 2014.09.17
아버지의 나이 - 정호승   (0) 2014.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