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북한강에서 - 정호승

효림♡ 2015. 2. 23. 09:00

* 북한강에서 - 정호승 

너를 보내고 나니 눈물 난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날이 올 것만 같다
만나야 할 때에 서로 헤어지고
사랑해야 할 때에 서로 죽여버린
너를 보내고 나니 꽃이 진다
사는 날까지 살아보겠다고

기다리는 날까지 기다려보겠다고
돌아갈 수 없는 저녁 강가에 서서
너를 보내고 나니 해가 진다
두 번 다시 만날 날이 없을 것 같은
강 건너 붉은 새가 말없이 사라진다
 *

 

 

* 우리가 어느 별에서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풀은 시들고 꽃은 지는데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서로 별빛마다 빛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새벽을 흔들어 깨우느냐

 

해 뜨기 전에
가장 추워하는 그대를 위하여
저문 바닷가에 홀로
사람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밤 어느 별에서
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느냐
어느 별의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

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 * 

 

* 겨울강에서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겨울강 강언덕에 눈보라 몰아쳐도

눈보라에 으스스 내 몸이 쓰러져도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강물은 흘러가 흐느끼지 않아도

끝끝내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어

쓰러지면 일어서는 갈대가 되어

청산이 소리치면 소리쳐 울리 *

 

* 강변역에서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 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햇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가슴 위로 소리 없이 지나갔다

우리가 만남이라고 불렀던

첫눈 내리는 강변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산에서
저녁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 

 

* 임진강에서   

아버지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임진강 샛강가로 저를 찾지 마세요

찬 강바람이 아버지의 야윈 옷깃을 스치면

오히려 제 가슴이 춥고 서럽습니다 

가난한 아버지의 작은 볏단 같았던

저는 결코 눈물 흘리지 않았으므로

아버지 이제 그만 발걸음을 돌리세요

삶이란 마침내 강물 같은 것이라고

강물 위에 부서지는 햇살 같은 것이라고

아버지도 저만치 강물이 되어

뒤돌아보지 말고 흘러가세요 

이곳에도 그리움 때문에 꽃은 피고

기다리는 자의 새벽도 밝아옵니다

길 잃은 임진강의 왜가리들은

더 따뜻한 곳을 찾아 길을 떠나고

길을 기다리는 자의 새벽길 되어

어둠의 그림자로 햇살이 되어

저도 이제 어딘가로 길 떠납니다

찬 겨울 밤하늘에 초승달 뜨고

초승달 비껴가며 흰 기러기떼 날면

그 어디쯤 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오늘도 샛강가로 저를 찾으신

강가에 얼어붙은 검불 같은 아버지 *

 

* 휴전선에서

하늘이 무너질 때까지 너를 기다렸다
눈부시게 밝은 햇살 아래 엎드려
하늘이 무너지고 눈이 내릴 때까지
너를 사랑했다

눈물 없이 꽃을 바라볼 수 없고
눈물 없이 별들을 바라볼 수 없어
흩어졌던 산안개가 다시 흩어질 때까지
죽어서 사는 길만 걸어서 왔다

녹슨 철조망 사이로
청둥오리떼들은 말없이 날아갔다 돌아오고
산과 산은 이어지고
강과 강은 흘러 흘러

누가 내 가슴 속  
푸른 하늘을 빼앗아갔을지라도
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
별들을 조용히 흔들어보았다 *

* 윤동주 무덤 앞에서
이제는 조국이 울어야 할 때다
어제는 조국을 위하여
한 시인이 눈물을 흘렸으므로
이제는 한 시인을 위하여
조국의 마른 잎새들이 울어야 할 때다

이제는 조국이 목숨을 버려야 할 때다
어제는 조국을 위하여
한 시인이 목숨을 버렸으므로
이제는 한 젊은 시인을 위하여
조국의 하늘과 바람과 별들이
목숨을 버려야 할 때다

죽어서 사는 길을 홀로 걸어간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웠던 사나이
무덤조차 한 점 부끄럼 없는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했던 사나이

오늘도 북간도 찬 바람결에 서걱이다가
잠시 마른 풀잎으로 누웠다 일어나느니
저 푸른 겨울하늘 아래
한 송이 무덤으로 피어난 아름다움을 위하여
한 줄기 해란강은 말없이 흐른다 *

 

* 폭포 앞에서  

아래로 떨어져 죽어도 좋다
떨어져 산산이 흩어져도 좋다
흩어져서 다시 만나 울어도 좋다
울다가 끝내 흘러 사라져도 좋다

끝끝내 흐르지 않는 폭포앞에서
내가 사랑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내가 포기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이제 증오마저 사랑스럽다
소리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
눈물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
머무를 때는 언제나 떠나도 좋고
떠날 때는 언제나 머물러도 좋다 *

 

* 정호승시선집[내가 사랑하는 사람]-열림원,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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