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 정호승

효림♡ 2017. 6. 10. 09:00

*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 정호승

나는 희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에는 희망이 없다

희망은 기쁨보다 분노에 가깝다

나는 절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졌을 뿐

희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절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은 절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다

희망만 있는 희망은 희망이 없다

희망은 희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보다

절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이 중요하다

 

희망에는 절망이 있다

나는 희망의 절망을 먼저 원한다

희망의 절망이 절망이 될 때보다

희망의 절망이 희망이 될 때

당신을 사랑한다 *

 

* 굴비에게

부디 너만이라도 비굴해지지 말기를

강한 바닷바람과 햇볕에 온몸을 맡긴 채

꾸덕꾸덕 말라가는 청춘을 견디기 힘들지라도

오직 너만은 굽실굽실 비굴의 자세를 지니지 않기를

무엇보다도 별을 바라보면서

비굴한 눈빛으로 바라보지 말기를

돈과 권력 앞에 비굴해지는 인생은 굴비가 아니다

내 너를 굳이 천일염에 정성껏 절인 까닭을 알겠느냐 *

 

* 낮은 곳을 향하여

첫눈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내린다

명동성당 높은 종탑 위에 먼저 내리지 않고

성당 입구 계단 아래 구걸의 낡은 바구니를 놓고 엎드린

걸인의 어깨 위에 먼저 내린다

 

봄눈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내린다

설악산 봉정암 진신사리탑 위에 먼저 내리지 않고

사리탑 아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의 늙은 두 손 위에 먼저 내린다

 

강물이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가야 바다가 되듯

나도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가야 인간이 되는데

나의 가장 낮은 곳은 어디인가

가장 낮은 곳에서도 가장 낮아진 당신은 누구인가

 

오늘도 태백을 떠나 멀리 낙동강을 따라 흘러가도

나의 가장 낮은 곳에 다다르지 못하고

가장 낮은 곳에서도 가장 낮아진 당신을 따라가지 못하고

나는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다 *

 

* 폐지(廢紙)

어느 산 밑

허물어진 폐지 더미에 비 내린다

폐지에 적힌 수많은 글씨들

폭우에 젖어 사라진다

그러나 오직 단 하나

사랑이라는 글씨만은 모두

비에 젖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다 *

 

*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별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그대를 만나러 팽목항으로 가는 길에는 아직 길이 없고
그대를 만나러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는 아직 선로가 없어도
오늘도 그대를 만나러 간다

푸른 바다의 길이 하늘의 길이 된 그날
세상의 모든 수평선이 사라지고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이 통곡하고
세상의 모든 등대가 사라져도
나는 그대가 걸어가던 수평선의 아름다움이 되어
그대가 밝히던 등대의 밝은 불빛이 되어
오늘도 그대를 만나러 간다

한배를 타고 하늘로 가는 길이 멀지 않으냐
혹시 배는 고프지 않으냐
엄마는 신발도 버리고 그 길을 따라 걷는다
아빠는 아픈 가슴에서 그리움의 면발을 뽑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짜장면을 만들어주었는데
친구들이랑 맛있게 먹긴 먹었느냐

그대는 왜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는 것인지
왜 아무리 보고 싶어 해도 볼 수 없는 세계인지
그대가 없는 세상에서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잊지 말자 하면서도 잊어버리는 세상의 마음을
행여 그대가 잊을까 두렵다

팽목항의 갈매기들이 날지 못하고
팽목항의 등대마저 밤마다 꺼져가도
나는 오늘도 그대를 잊은 적 없다
봄이 가도 그대를 잊은 적 없고
별이 져도 그대를 잊은 적 없다 *

 

* 흉터

아물지 않으면 흉터가 아니다

아물었기 때문에 흉터다

이제는 흉터가 남아 있다고 울지 말고

흉터가 아물었다고 봄길을 걸어라

오늘은 햇살이 따스하다

풀잎들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든다

흉터는 풀잎 위에 앉은 이슬의 눈동자

그 눈동자 속에 비친

봄 하늘을 나는 작은 새 *

 

* 물끄러미

당신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볼 때가 좋다

차가운 겨울 밤하늘에 비껴 뜬 보름달이 나를 바라보듯

풀을 뜯던 들녘의 소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듯

선암사 매화나무 가지에 앉은 새가

홍매화 꽃잎을 쪼다가 문득 나를 바라보듯

대문 앞에 세워둔 눈사람이 조금씩 녹으면서 나를 바라보듯

폭설이 내린 태백산 설해목 사이로 떠오른 낮달이 나를 바라보듯

아버지 영정 앞에 켜둔 촛불이 가물가물 밤새도록 나를 바라보듯

물끄러미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가 좋다

눈길에 버려진 타다 만 연탄재처럼
태백선 추전역 앞마당에 쌓인 막장의 갱목처럼
추적추적 겨울비에 떨며 내가 버려져 있어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 속에는
이제 미움도 증오도 없다
누가 누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사랑보다 연민이 있어서 좋다

 

* 별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가

사다리를 버린 사람은 별이 되었다

나는 사다리를 버리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고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시는데도

지붕 위에 앉아

평생 밤하늘 별만 바라본다 *

 

* 능소화

동백도 아니면서

너는 꼭 내가 헤어질 때만 피어나

동백처럼 땅에 툭 떨어지더라

너는 꼭 내가 배고플 때만 피어나

붉은 모가지만 잘린 채

땅에 툭툭 떨어져 흐느끼더라

낮이 밤이 되기를 싫어하고

밤이 아침이 되기를 싫어하는

모든 인생은 점점 짧아지는데

너는 꼭 내가 넘어질 때만 떨어져

발 아래 자꾸 밟히더라

내가 꼭 죽고 나면 다시 피어나

나를 사랑하더라 *

 

*정호승시집[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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