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무릎 - 정호승

효림♡ 2017. 8. 14. 09:00
* 무릎 - 정호승 
너도 무릎을 꿇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이 되었느냐
너도 무릎을 꿇어야만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데에
평생이 걸렸느냐
차디찬 바닥에
스스로 무릎을 꿇었을 때가 일어설 때이다

무릎을 꿇고

먼 산을 바라볼 때가 길 떠날 때이다

낙타도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먼저 무릎을 꿇고 사막을 바라본다
낙타도 사막의 길을 가다가
밤이 깊으면
먼저 무릎을 꿇고
찬란한 별들을 바라본다 *

* 정호승시집[이 짧은 시간 동안]-창비,2004

 

* 어느 소나무의 말씀

밥그릇을 먹지 말고 밥을 먹거라
돈은 평생 낙엽처럼 보거라
늘 들고 다니는
결코 내려놓지 않는
잣대는 내려놓고
가슴속에 한가지 그리움을 품어라
마음 한번 잘 먹으면 북두칠성도 굽어보신다
봄이 오면 눈 녹은 물에 눈을 씻고
쑥과 쑥부쟁이라도 구분하고
가끔 친구들과 막걸리나 마시고
소나무 아래 잠들어라 *

 

* 묵사발  

나는 묵사발이 된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첫눈 내린 겨울산을 홀로 내려와

막걸리 한잔에 도토리묵을 먹으며

묵사발이 되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묵사발이 있어야 묵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비로소

나를 묵사발로 만든 이에게 감사하기로 했다

 

나는 묵을 만들 수 있는 내가 자랑스럽다. 묵사발이 없었다면 묵은 온유의 형태를 잃었을 것이다

내가 묵사발이 되지 않았다면

나는 묵의 온화함과 부드러움을 결코 얻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 또한 순하고 연한 묵의

겸손의 미덕을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묵사발이 되었기 때문에 당신은 묵이 될 수 있었다

굴참나무에 어리던 햇살과 새소리가 묵이 될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 있었다 *

정호승시집[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2017

 

* 거미줄

산 입에 거미줄을 쳐도
거미줄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거미줄에 걸린 아침 이슬이
햇살에 맑게 빛날 때다
송이송이 소나기가 매달려 있을 때다

산 입에 거미줄을 쳐도
거미줄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진실은 알지만 기다리고 있을 때다
진실에도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진실은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고
조용히 조용히 말하고 있을 때다

* 결핍에 대하여
밤하늘은 자신의 가슴을 별들로 가득 채우지 않는다
별들도 밤하늘에 빛난다고 해서 밤하늘을 다 빛나게 하지 않는다
나무가 봄이 되었다고 나뭇잎을 다 피워올리는 게 아니듯
새들도 날개를 다 펼쳐 모든 하늘을 다 날아다니는 게 아니다
산에서 급히 내려온 계곡의 물도 계곡을 다 채우면서 강물이 되지 않고
강물도 강을 다 채우지 않고 바다로 간다
누가 인생의 시간을 가득 다 채우고 유유히 웃으면서 떠나갔는가
어둠이 깊어가도 등불은 밤을 다 밝히지 않고
봄이 와도 꽃은 다 피어나지 않는다
별이 다 빛나지 않음으로써 밤하늘이 아름답듯이
나도 내 사랑이 결핍됨으로써 아름답다
정호승시집[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2017

'정호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 정호승   (0) 2017.06.10
봄눈 - 정호승  (0) 2016.02.14
북한강에서 - 정호승   (0) 2015.02.23
서울의 예수 - 정호승   (0) 2015.02.16
슬픔으로 가는 길 - 정호승  (0) 2015.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