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안도현 동시 모음

효림♡ 2015. 7. 24. 09:00

* 호박꽃 - 안도현

호호호호 호박꽃

호박꽃을 따버리면

애애애애 애호박

애호박이 안 열려

호호호호 호박전

호박전을 못 먹어 *

 

* 배꼽시계

(배) 배가 고프니?

(꼬) 꼬르륵꼬르륵

(ㅂ) 밥 먹어야 할

(시) 시간이라고?

(계) 계산 하나는 잘하네 *

 

* 소나기

집으로

뛰는

아이들

 

아이들보다

먼저

뛰는

 

소보다

앞서

뛰는

빗줄기 *

 

* 위층 아기

쾅쾅쾅쾅 뛰어가면

그렇지,

일곱 살짜리일 거야

 

콩콩콩콩 뛰어가면

그렇지,

네 살짜리일 거야 *

 

* 나만의 비밀

개울에서 놀다가 그만 급해서

물속에 앉아 쉬를 하고 말았습니다

행여 누가 볼까 두리번두리번

나 혼자 몸을 한 번 떨었습니다

개울물이 팬티 속에 손을 넣어

고추를 살살 씻어 주었습니다. *

 

* 뻐꾸기

봄이 간다 뻐꾹

꽃이 진다 뻐꾹

알 낳았다 뻐꾹

남의 둥지에 뻐꾹

나는 아니다 뻐꾹

남의 둥지에 뻐꾹

알 낳지 않았다 뻐꾹

도리도리 뻐꾹

정말이다 뻐꾹

찾아봐라 뻐꾹 *

 

* 풀벌레 소리

풀벌레 소리는

말줄임표

.......

 

장독대 옆에서도

풀숲에서도

.......

 

밤새도록

숨어서

.......

 

재잘재잘

쫑알쫑알

....... *

 

* 사랑

엄마가 스웨터를 걸고 난 뒤에

늦게 들어오신 아빠도 그 위에

매일 술 냄새 나는 남방을 거는

우리 집 안방 옷걸이

 

가만히 보니

아빠가 엄마를

뒤에서 살며시

껴안고 있는 모습!

 

아마
둘이 사랑하나 보다

 

* 눈 위의 발자국

토끼가 밟고 가면
토끼 발자국

멧돼지가 밟고 가면
멧돼지 발자국

토끼는 가벼워서
발자국도 얕고

멧돼지는 무거워서
발자국도 깊고 *

 

* 눈

돌담 아래
쌓인 눈
쌓였다가 소리 없이
녹는 눈

마당가
목련 가지에는
볼록한 꽃눈
꽃을 피우려고
점점
커지는 꽃눈

마루 밑에는
새끼들 내려다보는
누렁이의 눈
어미를 올려다 보는
강아지들의 눈 *

 

* 여치집

여치를 잡아
여치집 속에 가뒀더니

여치 소리만 뛰쳐나와
찌릿찌릿 찌찌 찌릿
풀밭에서 우네

* 쉼표 
크다가 말아 오종종한
콩나물 같기도 하고,

연못 위에 동동 혼자 노는
새끼 오리 같기도 하고,

구멍가게 유리문에 튄
흙탕물 같기도 하고,

국립박물관에서 언뜻 본
귀고리 같기도 하고,

동무 찾아 방향을 트는
올챙이 같기도 하고,

허리가 휘어 구부정한
할머니 같기도 하고, *


* 수박 한 통 
보름달 같은
수박 한 통

혼자서는
먹을 수 없지
다 함께
먹어야지
나눠서
먹어야지

달무리처럼
빙빙
둘러앉아
먹어야지 *

 

* 모자

모자야, 모자야

슬픈 모자야

군인 아저씨가 쓰면

그리 용감해 보이더니

지하도 입구 계단에

뒤집어놓은 모자야

딸랑, 동전이 담기는

슬픈 모자야 *

 

* 연어가 돌아오는 날

연어는

저 멀고 먼

알래스카 바다에서부터

우리나라까지

힘들게 힘들게

헤엄쳐 왔단다

 

그렇다면 분명히

연어의 몸속에는

쿵쾅쿵쾅 돌아가는

힘센 엔진이

들어있을 거야 

 

연어는

4년전에 떠난

강원도 남대천

어머니의 강으로

어렵게 어렵게

찾아서 갔단다

 

 

그렇다면 분명히

연어의 몸속에는

도착지를 잘 아는

멋진 선장이

살고 있을 거야 

 

* 풋살구

풋살구, 라는 말을 들으면

풋, 풋, 풋,

입속에 문득문득

풋살구가 들어와요

 

풋살구, 라는 말을 하면

살구, 살구, 살구,

입속에 자꾸자꾸

침이 생겨요 *

 

* 뻐꾹새와 소쩍새

낮에 울던 뻐꾹새

어두워지자 졸려서

소쩍새한테 부탁했네

-소쩍새야, 소쩍새야

  밤엔 네가 대신 울어 주렴,

  뻐꾹

 

그때부터 엄마 젖 물고 칭얼대던

아가도 소르르 잠이 들었네

 

밤에 울던 소쩍새

날이 밝자 지쳐서

뻐꾹새한테 부탁했네

-뻐꾹새야, 뻐꾹새야

  낮엔 네가 대신 울어 주렴,

  소쩍

 

그때부터 아가를 꼭 안고 자던

엄마도 일어나 쌀을 씻었네

 

* 살구꽃 지는 날

할머니, 살구나무가
많이 아픈가 봐요

살구꽃 이파리 깜박깜박
저렇게 떨어지는데
우두커니 먼 산만 바라봐요
흰 머리카락 올올이 풀어져도
빗을 생각을 안 해요
참빗을 어디 두었는지
잊어먹었나 봐요

할머니, 살구나무가
할머니처럼 아픈가 봐요 *

 

* 공터

아파트 옆 공터는
심심해서 울고 싶었지
올봄에 할아버지가
흙을 일구기 전까지는 말이야

할아버지가 괭이로 땅을 파헤치자
지렁이들이 꼼틀꼼틀,
땅강아지들이 엉금엉금,
공터는 옆구리가 마구 간지러웠어
할아버지는 씨앗을 뿌렸어
상추
쑥갓
옥수수
고구마
강낭콩

참을 수 없었지, 공터는
간지러움을 참다 못해
그만 웃음을 터뜨렸어
저것 좀 봐, 저것 좀 봐
공터가 혓바닥을
푸른 혓바닥을
날름날름 내밀고 있잖아 *

 

*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없는 거 빼고 다 있단다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에는

달팽이가 기어다니는 길이 있고

(과속 단속하는 교통경찰은 없고)

달팽이가 아침마다 물 긷는 우물이 있고

그 우물가에는 아기 무당벌레의

기저귀를 빠는 엄마 무당벌레가 있고

(일회용 기저귀는 쓰지 않고)

나비가 소나기를 피해 잠깐 쉬어가는

간이휴게소가 있단다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에는

학교도 안 가고 자기 집 베란다에서

하루종일 그네를 타고 노는 거미가 살고

(거미는 물론 과외를 받은 적 없고)

형제끼리 다투다가 회초리 맞고

종아리 빨갛게 된 고추잠자리가 살고

밤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험상궂은 불나방 아저씨가 살고

(아저씬 밤늦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지는 않아)

그 옆집에는 땅을 가로 재며 기어다니는

자벌레 영감이 혼자 산단다

(자식 없고 가난해도 모두들 존경하지)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에는

앞다리가 날카로운 사마귀와

고약한 냄새로 적을 물리치는 노린재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고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다가 죽는

하루살이의 무덤이 있고

(그 근처에는 고요한 절과 교회당이 있고)

무덤 옆에는 또 수 많은 벌레의 알들이

마을의 새로운 주민이 되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단다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에는

정말이지 없는 것 빼고 다 있단다.

 

* 안도현동시집[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실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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