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 - 오민석
개울가에 매화보다 먼저 개불알꽃이 머리를 들고 있다 뜨거운 불알도 꽃잎에 들어야 별이 된다나 바람에 흔들리는 탁구공들 터질 듯이 탱탱한데 털개불알, 노랑개불알, 큰개불알 복주머니 난초라나 봄까치꽃이라나 눈 녹은 개울가에 노루오줌이 흥건하다 * * 꽃 꽃은 우주다 꽃 속엔 먼 궤도에서 날아온 별빛과 유성처럼 빛나는 섹스가 있다 폭풍의 바다와 죽음 같은 쾌락 푸르른 인광(燐光)의 시간 꽃은 잎 벌려 세상을 받아들이고 팽팽하게 부푼 꽃잎들 위에서 세상은 비로소 적멸(寂滅)의 기쁨을 완성한다 그리하여 꽃 속에 저무는 세상은 얼마나 적막한가 이제 반쯤 걸어왔으니 문 닫히기 전 천천히 가자 온통 꽃길이다 * 그리운 명륜여인숙 잠 안 오는 밤 누워 명륜여인숙을 생각한다 만취의 20대에 당신과 함께 몸을 누이던 곳 플라타너스 이파리 뚝뚝 떨어지는 거리를 겁도 없이 지나 명륜여인숙에 들 때 나는 삭풍의 길을 가고 있음을 몰랐네 사랑도 한때는 욕이었음을 그래서 침을 뱉으며 쉬발, 당신을 사랑해요, 라고 말했었지 문학이 지고 철학도 잠든 한밤중 명륜여인숙 30촉 흐린 별빛 아래에서 우린 무엇이 되어도 좋았네 루카치와 헤겔과 김종삼이 나란히 잠든 명륜여인숙 혈관 속으로 알코올이 밤새 유랑할 때 뒤척이는 파도 위로 느닷없이 한파가 몰려오곤 했지 새벽 가로등 눈발에 묻혀갈 때 여인숙을 나오면 한 세상을 접은 듯 유숙의 종소리 멀리서 흩어지고 집 아닌 집을 찾아 우리는 다시 떠났지 푸른 정거장에 지금도 함께 서 있는 당신, 그리고 우리 젊은 날의, 그리운 명륜여인숙 * * 백석을 읽다가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던 백석을 읽다가 문득 생각한다 나타샤와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던 백석은 결국 밤 열차를 타지 못했다 그는 주저앉아 ‘한없이 아름다운 공산주의의 노을’을 노래했다 ‘당과 조국의 은혜’를 선물로 받다가 마침내 시를, 세상을 접었다 사회주의가 아름다운 것은 자본주의 안에서야, 사랑을 외치려거든 사랑이 없는 곳에서 외치란 말이야, 쉬발, 시를 버린 백석이 나타샤 대신 웬 군관동무를 데리고 소주를 마시고 있다 침침한 분단의 하늘에 눈이 푹푹 날리고 나타샤는 그를 기다리다 시베리아로 떠났다 가로수길 어디에도 혁명은 없고 웬 술 취한 행인이 지구를 흔들고 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린다던 백석이 버리지 못한 세상에 눈이 푹푹 쌓이는 밤 나는 기껏해야 친구 하나도 불러내지 못하고 속절없이 삼수군 관평리 국영협동조합에서 양치기를 하는 백석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 * 초록의 힘
초록의 힘은 자라는 것 초록의 힘은 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끝없이 손을 내미는 것 노란, 빨간, 하얀 도화선에 마구 불을 붙이는 것 행성들 다 폭발한 후 황홀한 색동으로 과감히 쓰러져주는 것 결빙의 때에 아주 잊혀져주는 것 그러다 어느 날 문득 허공을 향해 푸른 화살을 다시 쏘아 올리는 것 불의 행성들을 일제히 터뜨리는 것 폭죽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때 되면 번개의 입술을 다시 쑤욱 내미는 것 자라는 것 참는 것 또 오는 것. * * 먼 행성 벚꽃그늘 아래 누우니 꽃과 초저녁달과 먼 행성들이 참 다정히도 날 내려다본다 아무것도 없이 이 정거장에 내렸으나 그새 푸르도록 늙었으니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느냐 아픈 봄마저 거저 준 꽃들 연민을 가르쳐준 궁핍의 가시들 오지않음으로 기다림을 알게 해준 당신 봄이면 꽃이 피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잘린 체게바라의 손에서 지지문을 채취하던 CIA 요원 홀리오 가르시아도 지금쯤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날 그 거리에서 내가 던진 돌멩이는 지금쯤 어디로 날아가고 있을까 혁명의 연기가 벚꽃 자욱하게 지는 저녁에 나는 평안하다 미안하다 늦은 밤의 술 약속과 돌아와 써야할 편지들과 잊힌 무덤들 사이 아직 떠다니는 이쁜 물고기들 벚꽃 아래 누우니 꽃잎마다 그늘이고 그늘마다 상처다 다정한 세월이여 꽃 진 자리에 가서 벌서자 * * 오민석시집[그리운 명륜여인숙]-시인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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