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가을밤 귀뚜라미 울음 - 박형준

효림♡ 2015. 9. 14. 09:00

* 가을밤 귀뚜라미 울음 - 박형준  

시가 써지지 않아

책상의 컴퓨터를 끄고 방바닥으로 내려와

연필을 깎는다

저녁 해가 넘어가다 말고

창호지에 어른거릴 때면

방문 앞에 앉아서 연필 칼끝으로

발뒤꿈치의 굳은살을 깎아내던

아버지처럼, 그것이 노동의 달콤함이고

그만의 소박한 휴식이었던 그 사람처럼

 

살아 계실 때 시골에서 쌀과 깻잎을 등에 지고

말씀 한 번 없이 내 반지하 방에 찾아오던 아버지

비좁은 방바닥에 엎드려 시를 쓰는 아들을 위해

벽을 사이에 둔 것처럼 돌아앉아

버릇처럼 발바닥의 굳은살을 떼어내던 사람

시가 써지지 않아 고개 들면

어느새 반지하의 창에 어른거리던 저녁 빛이

작고 구부정한 등에 실루엣으로 남아 있고

 

글씨 그만 쓰고 밥 먹거라

방해될까 봐 돌아앉지 못하고

내 등을 향한 듯한 그 사무치던 음성

 

밥과 같은 시

영원히 해갈되지 않으면서

겨우 배고픔만 면하게 해주던 시처럼

가을밤 귀뚜라미 울음

이제는 무디고 무디어진 연필심에서 저미어 나온다.

* 박형준시집[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문지

 

* 춤

첫 비행이 죽음이 될 수 있으나, 어린 송골매는
절벽의 꽃을 타는 것으로 비행 연습을 한다.

 

근육은 날자마자
고독으로 오므라든다

 

날개 밑에 부풀어오르는 하늘과
전율 사이
꽃이 거기 있어서

 

絶海孤島,
내리꽂혔다
솟구친다
근육이 오므라졌다
펴지는 이 쾌감

 

살을 상상하는 동안
발톱이 점점 바람 무늬로 뒤덮인다
발 아래 움켜쥔 고독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
외침이 절해를 찢어놓으며
서녘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 동이일까

 

천길 절벽 아래
꽃파도가 인다 *
* 박형준시집[춤]-창비

 

* 나는 달을 믿는다

달에 골목을 낼 수 있다면 이렇게 하리,
서로 어깨를 비벼야만 통과할 수 있는 골목
그런 골목이 산동네를 이루고
높지만 낮은 집들이 흐린 삼십 촉 백열전구가 켜진
창을 가지고 있는 달
나는 골목의 계단을 올라가며
집집마다 흘러나오는 불빛을 보며 울리라,
판잣집을 시루떡처럼 쌓아올린 골목의 이집 저집마다
그렇게 흘러나오는 불빛 모아
나는 주머니에 추억 같은 시를 넣고 다니리,
저녁이 이슥해지면 달의 골목 어느 집으로 들어가
창턱에 떠오르는 지구를 내려다보며
한 권의 시집을 지구에 떨어뜨리리라,
달에는 아직 살 만한 사람들이 산다고
나를 냉대했던 지구에
또다시 밝아오는 아침을 바라보며 오늘도 안녕
그렇게 안부 인사를 하리라,
당신이 달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지을 때
혹은 꿈꾸거나 기쁠 때
달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분화구들이 생겨나지,
우리가 올려다 본 달 속에 얼마나 많은 거짓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슬픔이 있는지
그 거짓과 슬픔 속에서 속고 속이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던 것인지
나는 달의 분화구마다 골목을 내고 허름한 곳에서 가장 높은
판잣집의 저녁 창마다 떠오르는 삼십 촉 흐린 불빛으로 
지구를 내려다보며 울리,
명절날,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고향집 툇마루에서
저 식지 않을 투명한 불꽃을 머금고
하늘 기슭에 떠오른 창문을 바라본다
그렇게 달의 먼지 낀 창문을 열면
환한 호숫가에 모여 있는 시루떡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리
-작가세계, 2014년 겨울호

 

* 칠백만원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식구들 몰래 내게만
이불 속에 칠백만원을 넣어두셨다 하셨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이불 속에 꿰매두었다는 칠백만원이 생각났지
어머니는 돈을 늘 어딘가에 꿰매놓았지
대학 등록금도 속곳에 꿰매고
시골에서 올라왔지
수명이 다한 형광등 불빛이 깜빡거리는 자취방에서
어머니는 꿰맨 속곳의 실을 풀면서
제대로 된 자식이 없다고 우셨지
어머니 기일에
이젠 내가 이불에 꿰매놓은 칠백만원 얘기를
식구들에게 하며 운다네
어디로 갔을까 어머니가 이불 속에 꿰매놓은 칠백만원
내 사십 줄의 마지막에
장가 밑천으로 어머니가 숨겨놓은 내 칠백만원
시골집 장롱을 다 뒤져도 나오지 않는
이불 속에서 슬프게 칙칙해져갈 만원짜리 칠백 장 *

 

* 빗소리  

내가 잠든 사이 울면서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여자처럼

 

어느 술집

한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거의 단 한마디 하지 않은 채

술잔을 손으로 만지기만 하던

그 여자처럼

투명한 소주잔에 비친 지문처럼

 

창문에 반짝이는

저 밤 빗소리 *

* 박형준시집[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문학과지성사,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