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첫사랑 - 이우걸

효림♡ 2015. 9. 20. 09:00

* 첫사랑 - 이우걸

배경은 노을이었다

머릿단을 감싸 안으며

고요히 떴다 감기는 호수 같은 눈을 보았다

 

내게도 그녀에게도

준비해둔 말이 없었다 *

 

* 바퀴는 돌면서

길은 달리면서 바퀴를 돌리지만

 

바퀴는 돌면서 길을 감고 있다

 

모나고 흠진 이 세상

 

둥글게 감고 있다. *

 

* 어머니

아직도 내 사랑의 
주거래은행이다 
목마르면 대출받고 정신 들면 갚으려 하고 
갚다가 
대출받다가 
대출받다가 
갚다가..... * 

 

* 그늘

세상 모든 그늘이란

그 사물의 어머니인 것

빛이었던 하루의 외롭고 아픈 상처를

안으로 쓰다듬어서

다시 내일을

일군다 *

 

* 팽이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

 

* 아직도 거기 있다 -부곡리

쓰다 둔 수저가 아직도 거기 있다

내 꿈의 일기장이 아직도 거기 있다

어머니 반짇고리가 아직도 거기 있다 *

 

* 실상사
구름을 잠재우고 산을 잠재우고
나그네를 잠재우고 마을을 잠재우면서
불면의 밤을 가꾸는
너는 무엇인가?

방황은 외투처럼 네가 걸치는 화두일까
벼랑을 건너가는 종소리의 아픔일까
석장승 외진 입상의 정처 없는 시선일까.

뜰에 진 꽃잎 하나 무심히 줍는 사이
천년이 흘러가고 또 천년이 온다 해도
스스로 채워 둔 족쇄
풀 길 없는 사유의 강.
 

 

* 삼랑진역 
낙엽이 쌓여서
뜰은 숙연하다
노인 혼자 벤치에 앉아
안경알을 닦는 사이
기차는 낮달을 싣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 이우걸시집[아직도 거기 있다]-서정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