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사랑 - 이우걸
배경은 노을이었다
머릿단을 감싸 안으며
고요히 떴다 감기는 호수 같은 눈을 보았다
내게도 그녀에게도
준비해둔 말이 없었다 *
* 바퀴는 돌면서
길은 달리면서 바퀴를 돌리지만
바퀴는 돌면서 길을 감고 있다
모나고 흠진 이 세상
둥글게 감고 있다. *
* 어머니
아직도 내 사랑의
주거래은행이다
목마르면 대출받고 정신 들면 갚으려 하고
갚다가
대출받다가
대출받다가
갚다가..... *
* 그늘
세상 모든 그늘이란
그 사물의 어머니인 것
빛이었던 하루의 외롭고 아픈 상처를
안으로 쓰다듬어서
다시 내일을
일군다 *
* 팽이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
* 아직도 거기 있다 -부곡리
쓰다 둔 수저가 아직도 거기 있다
내 꿈의 일기장이 아직도 거기 있다
어머니 반짇고리가 아직도 거기 있다 *
* 실상사
구름을 잠재우고 산을 잠재우고
나그네를 잠재우고 마을을 잠재우면서
불면의 밤을 가꾸는
너는 무엇인가?
방황은 외투처럼 네가 걸치는 화두일까
벼랑을 건너가는 종소리의 아픔일까
석장승 외진 입상의 정처 없는 시선일까.
뜰에 진 꽃잎 하나 무심히 줍는 사이
천년이 흘러가고 또 천년이 온다 해도
스스로 채워 둔 족쇄
풀 길 없는 사유의 강.
* 삼랑진역
낙엽이 쌓여서
뜰은 숙연하다
노인 혼자 벤치에 앉아
안경알을 닦는 사이
기차는 낮달을 싣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 이우걸시집[아직도 거기 있다]-서정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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