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고 서러운 날들 - 청 화
내 아프고 서러운 날들이 남긴
붉은 고추를 먹고
그 매운 맛에 딸꾹질하며
딸꾹질하며 긁어진 잔뼈는
무엇에도 부러지지 않는 강철이 되어
온갖 구름 헤치고 찾은 나의 하늘
상(傷)한데 없이 잘 받치고 있네.
요만한 하늘을 만나 받치는
요만한 기둥이 되기 위해
아ㅡ 나에게는 나에게는
그 아프고 서러운 날들이 있었던가. *
* 물이 없는 얼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애시당초 우러를 하늘이 없어
그의 얼굴에는
작은 모래 한 알만 떨어져도
동그랗게 파문이 이는 물이 없다.
언제 어디서나 정직하고 순수한 물
이 물이 없는 얼굴에
집을 짓고 사는 벌레가 있는데
그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피일까? 메뚜기일까?
오늘 매화꽃 띄운 차 한 잔 권하며
사람이 대체 무어냐고 묻고 싶은
저 물이 없는 얼굴, 물이 없는 얼굴들..... *
* 은행잎들을 보오
가을 은행나무 아래 떨어진
노오란 은행잎 은행잎들을 보오.
저것은 지난 밤
어느 찻집에서 만나 나눈,
우리들의 사랑고 추억과 그리움과
삶의 이야기가 아니오.
가을로부터 푸르른 하늘로부터
무언가 애타는 가슴으로부터
사무쳐 사무쳐 사무쳐 오는
그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
결국 하룻밤의 짧은 만남은
저렇게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우리는 또 헤어지는 것이오
그대는 바다로 나는 산으로. *
* 꽃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저를 꺾는 도둑에게도
향기를 주는 꽃을 보면. *
* 주인(主人)
ㅡ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어디서나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이 다 참된 것이다. ㅡ임제
나무들이 뽑히는 태풍이 부느냐
나는 나의 두 발로 버텨 쓰러지지 않겠다.
먹구름이 몰려와 폭우를 퍼붓느냐
나는 나의 자아(自我)까지 비 맞지 않겠다.
사람들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를 가는지
검은 짐승의 털옷들을 다투어 입고....
그에 놀래어 눈빛 불안한 비둘기들
백합꽃 물고 다 날아간 이 도시
어느 미친 개 같은 세상이 뛰어와
여기저기 뼈다귀 뜯는 소리가 나더라도
그래도 거기 향기한 흙은 찾아 깊이 파고
한 그루 청죽을 심는 주인이 된다면
어찌 나의 진심까지가 뿌리를 잃고
하늘에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는 연기이겠는가. *
* 눈
눈이 옸으면 싶다
찔레꽃만 보아도
물이 흥건한 가슴이 되던
그 때가 그리운 날....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순백의 눈이 녹아 사라지고
그 밑 불탄 폐허의 집터
앙상한 돌들이나 만나는 것인가.
눈이 왔으면 싶다
나도 하얗고 세상도 하얀해
마냥 설레고 좋은 눈
순수한 영혼을 깨어나게 하는 눈
아 다시 눈이 왔으면 싶다
촉촉한 습기가 없는 삶
한 포기 풀도 보이지 않고
마른 모래만 밟히는 이 발 앞에. *
* 청화시집[물이 없는 얼굴]-인간과문학사
* 청화스님
-1962년 출가
-1977년 불교신문 신춘문예[미소]당선
-산문집[돌을 꽃이라 부른다면],1988 시집[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2009 산문집[향기를 따라가면 꽃을 만나고],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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