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물이 없는 얼굴 - 청화스님

효림♡ 2016. 12. 2. 19:11

* 아프고 서러운 날들 - 청 화

내 아프고 서러운 날들이 남긴

붉은 고추를 먹고

그 매운 맛에 딸꾹질하며

딸꾹질하며 긁어진 잔뼈는

무엇에도 부러지지 않는 강철이 되어

온갖 구름 헤치고 찾은 나의 하늘

상(傷)한데 없이 잘 받치고 있네.

요만한 하늘을 만나 받치는

요만한 기둥이 되기 위해

아ㅡ 나에게는 나에게는

그 아프고 서러운 날들이 있었던가. *

 

* 물이 없는 얼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애시당초 우러를 하늘이 없어

그의 얼굴에는

작은 모래 한 알만 떨어져도

동그랗게 파문이 이는 물이 없다.

언제 어디서나 정직하고 순수한 물

이 물이 없는 얼굴에

집을 짓고 사는 벌레가 있는데

그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피일까? 메뚜기일까?

오늘 매화꽃 띄운 차 한 잔 권하며

사람이 대체 무어냐고 묻고 싶은

저 물이 없는 얼굴, 물이 없는 얼굴들..... *

 

* 은행잎들을 보오

가을 은행나무 아래 떨어진

노오란 은행잎 은행잎들을 보오.

 

저것은 지난 밤

어느 찻집에서 만나 나눈,

 

우리들의 사랑고 추억과 그리움과

삶의 이야기가 아니오.

 

가을로부터 푸르른 하늘로부터

무언가 애타는 가슴으로부터

 

사무쳐 사무쳐 사무쳐 오는

그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

 

결국 하룻밤의 짧은 만남은

저렇게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우리는 또 헤어지는 것이오

그대는 바다로 나는 산으로. *

 

* 꽃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저를 꺾는 도둑에게도

향기를 주는 꽃을 보면. *

 

* 주인(主人)

ㅡ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어디서나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이 다 참된 것이다. ㅡ임제

 

나무들이 뽑히는 태풍이 부느냐

나는 나의 두 발로 버텨 쓰러지지 않겠다.

 

먹구름이 몰려와 폭우를 퍼붓느냐

나는 나의 자아(自我)까지 비 맞지 않겠다.

 

사람들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를 가는지

검은 짐승의 털옷들을 다투어 입고....

 

그에 놀래어 눈빛 불안한 비둘기들

백합꽃 물고 다 날아간 이 도시

 

어느 미친 개 같은 세상이 뛰어와

여기저기 뼈다귀 뜯는 소리가 나더라도

 

그래도 거기 향기한 흙은 찾아 깊이 파고

한 그루 청죽을 심는 주인이 된다면

 

어찌 나의 진심까지가 뿌리를 잃고

하늘에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는 연기이겠는가. *

 

* 눈

눈이 옸으면 싶다

찔레꽃만 보아도

물이 흥건한 가슴이 되던

그 때가 그리운 날....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순백의 눈이 녹아 사라지고

그 밑 불탄 폐허의 집터

앙상한 돌들이나 만나는 것인가.

 

눈이 왔으면 싶다

나도 하얗고 세상도 하얀해

마냥 설레고 좋은 눈

순수한 영혼을 깨어나게 하는 눈

 

아 다시 눈이 왔으면 싶다

촉촉한 습기가 없는 삶

한 포기 풀도 보이지 않고

마른 모래만 밟히는 이 발 앞에. *

 

* 청화시집[물이 없는 얼굴]-인간과문학사

 

* 청화스님

-1962년 출가

-1977년 불교신문 신춘문예[미소]당선

-산문집[돌을 꽃이라 부른다면],1988 시집[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2009 산문집[향기를 따라가면 꽃을 만나고],2009

'좋아하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이 오시네 - 이상화  (0) 2016.12.30
새 아침에 - 신경림   (0) 2016.12.27
좋은 시절 - 장석주  (0) 2016.08.17
태산(泰山)이시다 - 김주대  (0) 2016.07.06
그리운 나무 - 정희성   (0) 2016.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