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 황인숙

효림♡ 2017. 12. 26. 09:30

*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 황인숙 

하얗게

하얗게

눈이 시리게

심장이 시리게

하얗게

 

네 밥그릇처럼 내 머리속

 

아, 잔인한, 돌이킬 수 없는 하양!

외로운 하양! 고통스런 하양!
불가항력의 하양을 들여다보며

미안하고, 미안하고
그립고 또 그립고 *

 

* 송년회

칠순 여인네가 환갑내기 여인네한테 말했다지
"환갑이면 뭘 입어도 예쁠 때야!"
그 얘기를 들려주며 들으며
오십대 우리들 깔깔 웃었다

나는 왜 항상
늙은 기분으로 살았을까
마흔에도 그랬고 서른에도 그랬다
그게 내가 살아본
가장 많은 나이라서

지금은, 내가 살아갈
가장 적은 나이
이런 생각, 노년의 몰약 아님
간명한 이치
내 척추는 아주 곧고
생각 또한 그렇다(아마도)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

 

* 생활의 발견 

소스 맛에는 중독성이 있다

때로 소스를 맛있게 먹기 위해

돈가스가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다

돈가스 소스는 돈가스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게

연구하고 만든 것일 테지만

 

소스만 있으면 어떤 특정 음식의 맛을

상당 정도 느낄 수 있다

예컨대 맨밥에 돈가스 소스를 끼얹어 먹으면

돈가스와 흡사한 맛이 난다

 

시작법은 시의 소스

제 소스의 레시피를 가진 시인들이 부럽다

언제라도 한 접시 먹음직한 시를 내놓는 그들!

나는 레시피도 없고,

찬장 깊숙한 데서 꺼낸 인스턴트 돈가스 소스는

유통기한이 1년이나 지났다

그래도 가난한 나는

맛있게 먹지 *

 

* 해피 뉴 이어!

새해 첫 해를 보러

동쪽 바닷가에 갔었죠

모래밭 여기저기

혼자서 둘이서 여럿이서

모르는 사람들이 서 있었죠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바람에 목도리와 머리카락 날리면서

두근두근

해를 기다렸죠

기다리지 않아도 해는 뜨겠지만

우리는 기다렸죠

푸른 파도

검은 솔숲

흰 모래알들

무대는 그대로지만

두근두근 눈빛들, 갈채와 환호 소리

해피! 뉴! 이어!!

아무리 태무심한 해님이라도

쬐금은 놀라고 떨렸을 거에요

 

* 황인숙시집[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 지성사,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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