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헛꽃 - 박두규

효림♡ 2018. 11. 10. 09:00

* 헛꽃 -산수국꽃은 너무 작아 꽃 위에 또 헛꽃을 피워 놓고
  제 존재를 수정해 줄 나비 하나를 기다린다 - 박두규

숲에 들어 비로소 나의 적막을 본다

저 가벼운 나비의 영혼은 숲의 적막을 날고

하얀 산수국, 그 고운 헛꽃이 내 적막 위에 핀다

기약한 세월도, 기다림이 다하는 날도 오기는 오는 걸까

이름도 없이 서 있던 층층나무, 때죽나무도 한꺼번에 슬퍼지던 날

그리운 얼굴 하나로 세상이 아득해지던 날

내 적막 위에 헛꽃 하나 피었다 *

 

* 이파리 하나만 달고
언젠가 나는 반드시
잔가지 다 잘라내고
몸통 하나로만 남겠다
뿌리도 한 가닥만 땅에 박고
이파리도 달랑 하나만 달고
그렇게 단정한 아침을 맞으리
가장 가벼운 몸을 이루어
수직으로 홀로 깊어지면
그 어둠 속
맑은 물줄기 소리도 들으리 *
 

* 숲에 들다
그대 눈부신 속살에 들면
편백나무 서늘한 그늘 어디쯤에
정처 없는 것들의 거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다만 그 생각이 무사하기를 빌며
그대 앞에 이르렀을 뿐이다

그대 안에 드는 일이 두렵기도 하나
단지, 때가 되어 어미의 자궁 밖을 나왔던 것처럼
마침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온 것뿐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렇게 또 날이 저물었을 뿐이다

그대의 어디쯤에
달빛에 빛나는 지붕 하나가 있기를 바란다.
그곳에 들어 내 눈부신 맨몸을 볼 수 있다면
사랑한 사람들이 이승을 떠난 것도
잠 못 이루는 짐승들의 매일 밤 울음소리도
그대에 이르기 위한 육탈肉脫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하리

강줄기를 타고 오는 한 줄기 바람에도
이승의 한 십년을 뚝, 떼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숲에 쌓인 무수한 잎들의 신음소리가
나의 일상으로 진입해 오고
해가 지는 세상의 두려움 위로
설레는 가슴은 늘 두근거리기를 바란다

그렇게 허물을 벗고
단 한 번의 해가 오로지 나에게로 올 것을 믿는다
나는 달이 뜨는 그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

 

* 삼홍소에서 봄을 맞다
봄맞이 산행을 한다고
산을 오르긴 했는데 어쩌다 보니
가을의 절정을 담아낸다는 삼홍소에 앉았다
단풍으로 온통 붉은 산과
계곡을 흐르는 낙엽과 물빛이 붉고
흥취에 젖은 술 한 잔에 도도하게 붉은 얼굴
이렇게 셋이 붉다는 피아골 삼홍소
무심코 계절을 바꿔 앉은 나는
왠지 봄에게 미안하다

해가 바뀌면 늘 찾아오는 봄이건만
예전엔 봄을 맞는 마음도 각별했었다
마른 가지가 낭창낭창해진 새잎을 튀우는 것이며
얼었던 물소리가 소란스럽게 되살아나는 것들이
그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것들이
그렇게 가슴을 설레게 했다
세상이 순리대로 바뀌고 변하는 것이
그렇게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하지만 요즘은 봄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왠지 자꾸 심사가 뒤틀린다
신문의 톱기사도 눈에 안 들어오고
시 한 구절도 제대로 안 읽혀진다
가장 정직하게 세상을 바꿔낸
봄도, 봄맞이도 뒷전에 두고 낮술만 밝혔다
온 산이 푸르름으로 뚝뚝 젖고
계곡은 연둣빛 물살로 소란스러운데
계곡을 헛디딘 나만
혼자서 세월을 놓치고 얼굴이 붉다.

 

* 시인의마을
숲에 왔으나 숲은 없고

어린 편백들이 옹알옹알 자라고 있었다

그 숲에서 나는 하루에도 서너 번 길을 잃는다

잃어버린 길 위에도 바람은 불고

부는 바람에는 꽃들의 향내가 가득하다

어디에서 왔나, 이 향기

궁륭의 하늘 그 끝에서 오신 것인가

비로소 어머니가 입혀주신 배냇저고리를 벗고 싶었다


그대는 이렇게 늘 일상으로 건너오건만

나도 그렇게 그대의 일상으로 건너가고 있는지

매일 아침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을 놓치지는 않는지

내가 놓친 물고기 한 마리는

푸른 하늘을 헤엄쳐 그대에게 이를 수 있는지


박두규시집[숲에 들다]-애지,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