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향기로 비우고 나비는 춤으로 비운다 - 박두규

* 상강(霜降) - 박두규 

  여름내 침략을 일삼던 칡이나 환삼덩굴도 잠잠해지고 강물은 스스로 야위어 몸을 낮추더니 어둠의 바닥이 되었다. 서리님 오시려나 보다. 모두가 지극정성 낮은 자세로 한 시절을 맞으니 나도 이제 말도 좀 줄이고 먹는 것도 줄여야겠다. 수심 깊이 외로워져 퀭한 눈빛에 노을이 젖으면 그나마 여름 설거지도 끝난 것인가. 이제 누가 위선을 떤다고 나무라도, 바짝 엎드려 있으면 그만이다. 귀밑머리에 허연 서리가 내려도 어느 바위틈의 들국화, 노란 꽃봉오리 하나 맺지 않을 것인가. *

 

* 두텁나루 숲 편지10

   -선암사.뒤뜰.늙은.매꽃.ㅇ.ㅅ.ㅅ

전라선 새벽 열차가 한 목숨의 봄꿈이 궁금해 오신다.

두텁나루 물줄기 따라 밤새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신다.

 

선암사.뒤뜰.늙은.매꽃. 육백 년 봄날 탱탱한 꽃망울도

사실은 이 세상사 꿈 한 자락이 궁금해 오신다.

 

눈 덮인 히말라야의 물고기 같은 그런 꿈 말고

잃어버린 유년의 고무신 한 짝 같은 그런 꿈 말고

 

저 너머를 이승에서 뒤집어쓰려는 이 몽환(夢幻)의 봄날

날 선 개똥밭의 꿈 한 자락을 위하여

 

전생의 약속인 양 그대는 이렇게 왔건만

나는 텃밭의 서툰 괭이질로 그대를 맞이하네. *  

 

* 늙은이가 버리고 간 꽃을 줍다

  깊은 숲 아무도 가지 않는 그곳에 꽃 한 송이 피었다. 어디도 가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평생을 살다가 갔지만, 그 꽃은 세상의 비와 바람을 다 맞았고 꽃을 피워 봄이 되었고 벌과 나비의 양식이 되었고 씨를 맺어 생명을 잉태했다. 평생을 한곳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건만 스스로에게 또는 세상에게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는 늙은이가 버리고 간 그 꽃을 주어 들고 두리번거렸다. *

 

* 너무 화려한

등꽃 그늘 아래 서서

 

아무리 생각해도 죽음마저도 너무 화려한 이승에서

 

그 번다한 일상의 뒷골목 어디쯤에서

 

애욕의 봄이 지나가는 걸 본다.

 

발아래 수북이 쌓인 고운 목숨들

 

이제는 무심히 바라보는 일도 익숙해졌을 만한데

 

또 하루의 생채기가 깊게 파인다.

 

그대 떠난 자리의 꽃그늘이

 

아직도 짙다. *

 

* 꽃은 향기로 비우고 나비는 춤으로 비운다

옛적 말씀에 꽃은 향기로 비우고

나비는 춤으로 비운다는데

사람은 명줄을 놓아야만 비운다.

 

자동차는 휘발유로 채워 달리고

사람은 욕망으로 채워 한 세월을 나는데

그렇게 세상은 두려움도 없이 채우는 것들의 세상이다.

 

사람들이 채워내는 무지의 세월, 야만의 세월, 굴욕의 세월은

자신의 향기도, 자신의 춤도 없기 때문이다.

꽃이나 나비처럼 스스로를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

 

* 박두규시집[두텁나루 숲, 그대]-문학들시선,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