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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기(二十四節氣) 시 모음

효림♡ 2018. 11. 20. 09:00

* 입춘(立春) - 안도현

바깥에 나갔더니 어라, 물소리가 들린다

얼음장 속 버들치들이 꼭 붙잡고 놓지 않았을

물소리의 길이가 점점 길어진다

허리춤이 헐렁해진 계곡도 되도록 길게 다리를 뻗고

참았던 오줌을 누고 싶을 것이다

물소리를 놓아버린 뒤에도 버들치들은 귀가 따갑다

몸이 통통해지는 소리가 몸 속에서 자꾸 들려왔기 때문이다 *

* 안도현시집[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현대문학북스

 

* 우수(雨水) - 나종영 
선암사 해천당 옆에
수백년 묵은 뒷간 하나 있습니다
거기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문 틈새 이마 위로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목어(木魚) 흔들어 깨우고 가는
청솔 바람소리 보입니다
부스럭부스럭 누군가 밑닦는 소리 들리는데
눈 맑은 동박새가
매화 등걸 우듬지에 앉아
두리번두리번 뭐라고 짖어댑니다
천년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새로운 천년이 무섭게 밀려오는지
그 울음소리 대숲 하늘 한 폭 찢어놓고
앞산머리 훠이 날아갑니다
하릴없이 대나무 대롱 끝에 입술을 대고
한 모금 찬물을 삼키다가 옳거니
매화꽃 봉오리 움트는 소리
겨울 산그늘 얼음꽃 깨치고
봄 햇살 걸어오는 것 보았습니다 *

 

* 경칩(驚蟄) - 정양 

쌓인 눈 헤집고

복수초가 놀미욤한 얼굴을 내민다

얼음 사이에서 피기에

얼음새꽃이라고도 한다지

눈도 얼음도 안 가리고 저렇게

막무가내로 피는 까닭을

살얼음 끼는 골짜기에서

안 보아도 다 안다는 듯이

경칩날 밤 노랗게 산개구리 운다 *

 

* 춘분(春分) - 박목월

자하문
동대문
문 밖으로 나가는 길에
달아오르는 해
앞산머리의 부끄러운 이마
오오냐
자하문
동대문
문 안으로 들어오는 길에
기우는 햇살
앞산머리의 어두운 이마
오오냐, 오냐 *

 

* 청명(淸明) - 두목(杜牧) 

淸明時節雨紛紛 

路上行人欲斷魂

借問酒家何處有 

牧童遙指杏花村

-

청명이라 보슬보슬 비가 내리는데 

길가는 나그네 마음 자지러지네  

주막집 있는 곳 어디쯤이냐 물으니  

목동은 저만치 살구꽃핀 마을을 가리키네 *

* 이병한엮음[땅 쓸고 꽃잎 떨어지기를 기다리노라]-궁리

 

* 곡우(穀雨) - 이석구
한눈에 들어오는 창문 밖 살구나무
저 살구나무 아래로 놀러가 연애하자
꽃들이 자꾸 피어서
다닥다닥 붙어서

새끼손가락만 한 가지를 덮어주어
만개한 꽃송이들 구름처럼 번진 의자
가볍게 신발을 벗고
백 년 동안 앉아보자

굵은 빗방울이 멈춘
푸른 그늘 저만치로
봄날이 가기 전에 애인을 기다리자
허공의 꽃 진 자리마다
풋살구가 열린다 *
* 이석구시인[그늘의 초록을 만졌다]-문학의 전당,2018

 

* 봄날 입하 - 이문재

초록이 번창하고 있다.

초록이 초록에게 번져

초록이 초록에게 지는 것이다.

 

입하(立夏) 다.

늦은 봄이 넌지시

초여름의 안쪽으로 한 발

들어놓는 것이 아니다.

여름이 우뚝 서는 것이다.

 

아니다.

늦어도 많이 늦은

떠났어도 벌써 떠났어야 하는

늦은 봄이 모르는 척

여름에게 자라를 물려주는 것이다.

초록이 초록에게 져주는 것이다.

 

죽는 것은

제대로 죽어야 죽는다.

죽은 것은 언제나 죽어 있어야 죽음이다.

죽어서 죽는 것이 기적이다.

 

초록에서 초록으로

이별이 발생한다.

이토록 신랄하고 적나라하지 않다면

이별은 이별이 아니다.

오늘 여기 입하

지금 여기 이렇게 눈부시다. * 

* 이문재시집[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 소만(小滿) - 윤한로

봄 끝물

베란다 볕 좋다 미카엘라

빨강 고무대야에 따슨 물 가득

아버지 발딱 앉혀 닦아드린다

손 씻고 발 씻고 코도 팽 풀리고

가슴도 닦아드리고

이윽고 거기까지 닦아드리니

, 좋아라 애기처럼

보리 이삭처럼

뉘렇게 웃으시네

누렇게 패이시네

그새 울긋불긋 꽃 이파리 몇 장 날아들어

둥둥 대야 속 떠다니니

아버지 그걸로 또 노시니

미카엘라 건지지 않고 놔 두네

오늘만큼은 땡깡도 부리지 않으시네, 윤 교장선생 *

* 윤한로시집[메추라기 사랑 노래]-문학동네,2015

 

 

망종(芒種) - 홍해리

고향집 텃논에 개구리 떼 그득하것다
울음소리 하늘까지 물기둥 솟구치것다
종달새 둥지마다 보리 익어 향긋하것다
들녘의 농부들도 눈코 뜰 새 없것다
저녁이면 은은한 등불 빛이 정답것다
서로들 곤비를 등에 지고 잠이 들것다. *
* 홍해리시집[애란]-우이동 사람들,1998

 

* 하지(夏至) - 고영민

까치가 짖고

고양이가 올려다보는 저녁이다

 

고양이는 이내

등뼈의 긴장을 푼다

 

너무 높다

너에게 가기에는

 

어린 사과나무엔

푸른 사과들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다

어둠이 오고

사과나무의 까치가 가고

사과의 둘레가 가고

고양이가 사라진다

 

다 추억이다

이렇게 너랑 둘이 마주 앉아서

말을 하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어둠에 묻힌

사과나무의 지붕에서

오금저린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
* 고영민시집[사슴공원에서]-창비,2012

 

* 소서(消暑) - 白居易[당]   

何以消煩暑   端居一院中  眼前無長物   窓下有淸風

熱散由心靜   涼生爲室空  此時身自得   難更興人同 

* 더위를 삭이며

무엇으로 짜증스런 더위 삭일까 집 안에 단정하게 앉아 있으면 될 일

눈앞에 거추장스러운 것들 없고 창 아래서 시원한 바람이 이네

마음 고요하니 열기 흩어지고 방 안이 텅 비어 서늘함이 감도네

이러한 것 나 스스로 느끼긴 하지만 남과 함께 하기는 어렵다네 * 

* 이병한엮음[땅 쓸고 꽃잎 떨어지기를 기다리노라]-궁리


* 대서(大暑) - 강웅순
염소뿔도 녹는다는
소서와 입추 사이의 대서
황경(黃經)이 120에 이르면
물은 흙이 되고
흙은 물이 되며
풀은 삭아서 반딧불이 된다

장마에 돌도 자란다는
애호박과 햇보리 사이의 대오리
토용(土用)이 중복(中伏)에 이르면
씨앗은 꽃이 되고
꽃은 씨앗이 되며
태반은 삭아서 거름이 된다

붉은 배롱나무가
원추형 태양으로 타오르고
벼가 익는 하늘이
파랗게 맨발이다 *

 

* 입추(立秋) - 김용택

텃밭에 배추 씨 묻고

그대는 내 품을 파고드네. *

 

* 처서(處暑) - 문태준

얻어온 개가 울타리 아래 땅그늘을 파댔다

짐승이 집에 맞지 않는다 싶어 낮에 다른 집에 주었다

볕에 널어두었던 고추를 걷고 양철로 덮었는데

밤이 되니 이슬이 졌다 방충망으로는 여치와 풀벌레가

딱 붙어서 문설주처럼 꿈적대지 않는다

가을이 오는가, 십짝까지 심어둔 옥수숫대엔 그림자가 깊다

갈색으로 말라가는 옥수수 수염을 타고 들어간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나온다

가을이 오는가, 감나무는 감을 달고 이파리 까칠하다

나무에게도 제 몸 빚어 자식을 낳는 일 그런 성 싶다

지게가 집 쪽으로 받쳐 있으면 집을 떠메고 간다기에

달 점점 차가워지는 밤 지게를 산 쪽으로 받친다

이름은 모르나 귀익은 산새소리 알은채 별처럼 시끄럽다 *

 

* 백로(白露) - 이시영

떠도는 것들이 산천에 가득 차서

거적때기 같은 것으로 서로의 발을

덮어주며

잠든 것이 보이고

잠 못 들어 뒤척이던 인부 둘이서

두런거리며 그곳을 빠져나와

어디론지 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

 

* 추분(秋分) - 정양

밤이 길어진다고

세월은 이 세상에

또 금을 긋는다

다시는 다시는 하면서

가슴에 금 그을수록

밤은 또 얼마나 길어지던가

다시는 다시는 하면서 금 그을수록

돌이킬 수 없는 밤이 길어서

잠은 이렇게 짧아지는가 *

* 정양시집[철들 무렵]-문학동네,2009

 

* 한로(寒露) - 정희성

찬 이슬 내렸으니 상강(霜降)이 머지않다

귀뚜라미 울음소리 벽 사이에 들리겠네

지금쯤 벼 이삭 누렇게 익었으리

아, 바라만 보아도 배부를 황금벌판!

허기진 내 사람아, 어서 거기 가야지 * 

* 정희성시집[그리운 나무]-창비,2013

 

* 상강(霜降) - 박두규 

  여름내 침략을 일삼던 칡이나 환삼덩굴도 잠잠해지고 강물은 스스로 야위어 몸을 낮추더니 어둠의 바닥이 되었다. 서리님 오시려나 보다. 모두가 지극정성 낮은 자세로 한 시절을 맞으니 나도 이제 말도 좀 줄이고 먹는 것도 줄여야겠다. 수심 깊이 외로워져 퀭한 눈빛에 노을이 젖으면 그나마 여름 설거지도 끝난 것인가. 이제 누가 위선을 떤다고 나무라도, 바짝 엎드려 있으면 그만이다. 귀밑머리에 허연 서리가 내려도 어느 바위틈의 들국화, 노란 꽃봉오리 하나 맺지 않을 것인가. *

* 박두규시집[두텁나루 숲, 그대]-문학들시선,2013

 

* 입동(立冬) - 박형진

가고 오는 것이 사람뿐만은 아닌가
울 안 감나무 가지에는 붉은 감만 남고
새벽 뜰 앞에 나서면 어느새
기러기 하늘 높이 난다
추워지리란 예보를 들으니 더욱 쓸쓸해진다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는 비구름 아래
어느 핸 해마다 그러지 않으랴마는
걱정 따윈 다 저바다에 묻어나 둘까
거둘 것도 없는 밭에 와 빈지게를 벗고
하늘로 담배연기를 뽑아올린다
고구마순 한짐 콩깍지 한짐 져다 놓고
소막 비닐을 댄다
여름 내내 쳤던 모기장을 걷고
남루한 생활 아픈 마음에나처럼
여기저기 비닐조각을 덮대고 나니
무쪽도 바로 못 베어먹는다는
뼘만한 가을해 한나절이 또 가고
기다렸다는 듯 저녁 들어 비바람이 몰아친다
소와 함께 소막에 있노라니 날은 어두워져
올 겨울 아무 마련 없는 사람의 가슴도 어언간 따땃해진다. *

* 박형진시집[바구니 속 감자싹은 시들어가고]-창비,1994

 

* 소설(小雪) - 정양

햇살이 비쳐도 하늘에
더이상 무지개는 뜨지 않는다
찬바람이 하얀 눈 장만하느라
천둥도 번개도 무지개도 다 걷어먹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빚은 하얀 꿈들이 얼마나 강물에 빠져죽어야
하늘에 다시 무지개가 뜨는 건지
산마루에 산기슭에 희끗거리며
바람은 자꾸 강물 쪽으로만 눈보라를 밀어넣는다 *

* 정양시집[철들 무렵]-문학동네,2009

 

* 대설(大雪) - 정양

마을 공터에 버스 한 대 며칠째 눈에 파묻혀 있다

길들이 모두 눈에 묻혀서 아무 데나 걸어가면 그게 길이다

아무 때나 들어서면 거기 국수내기 화투판 끝에

세월을 몽땅 저당잡힌 얼굴들이 멸칫국물에

묵은 세월을 말아 먹고 있을 외딴집 앞

눈에 겨운 솔가지 부러지는 소리

덜프덕 눈더미 내려앉는 소리에

외딴집 되창문이 잠시 열렸다 닫힌다

잊고 살던 얼굴들이 모여 있는지

들어서서 어디 한번 덜컥 문을 열어보라고

제 발자국도 금세 지워버리는 눈보라가

자꾸만 바람의 등을 떠민다 *

* 정양시집[철들 무렵]-문학동네,2009

 

* 동지(冬至) - 함민복 

한석봉 어머니 깜박 책을 써는 사이

 

한석봉이 꾸뻑 떡을 읽는 사이 * 

* 함민복시집[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비,1996

 

* 소한 - 백무산

사과나무가 눈을 맞고 있다

하얀 꽃을 피우던 나무

붉은 열매 주렁주렁 달고 있던 나무

제 몸보다 더 많은 무게를 지탱하던 나무

어린것을 품은 여인의 몸처럼

둥글고 붉고 단물 가득 품던 나무

사과나무가 조용히 눈을 맞고 있다

그 많은 것들 다 내어주고

하나도 받아 안을 수 없는 몸

앙상한 뼈마디 삭정이 부러지는 소리 번져

희죽희죽 웃음이 목젖에 차오르는데

맨발이 공중에 둥둥 뜰 것 같은데

빈 가지에 바람 몇점과

새 몇마리 날아와

간신히 눌러 앉혀두는데

하얀 꽃을 받아들

빈손이 되는 나무

빈손만이 받아들 수 있는 꽃

사과나무의 손을 잡아주는

누군가의 흰 손이 보인다 *

* 백무산시집[그 모든 가장자리]-창비,2012 

 

* 대한(大寒) - 김보일

나의 병을 알고 너는 깊이 울었다

쇄골 근처 너의 눈물 묻은 자리가 따뜻했다

당신이라는 눈물의 온도에

오랜만에 나의 몸이 새집처럼 흔들렸다

 

방아깨비는 제 몸의 연초록을 어떤 풀꽃에서 옮겨 왔을까

누가 보면대(譜面臺)위에 어둠을 올려놓았나

어떤 음악이 나무들에게 겨울의 출구를 가르쳐 줄까

스무 개의 발가락으로 질문들을 모으다

꿈도 없이 잠든 칠흑의 밤이었다 *

* 김보일시집[살구나무 빵집]-문학과 행동,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