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매화와 매실 - 최두석

효림♡ 2008. 5. 7. 07:50

* 매화와 매실 - 최두석   

선암사 노스님께

꽃이 좋은지 열매가 좋은지 물으니

꽃은 열매를 맺으려 핀다지만

열매는 꽃을 피우려 익는다고 한다

매실을 보며 매화의 향내를 맡고

매화를 보며 매실의 신맛을 느낀다고 한다. 

 

꽃구경 온 객도 웃으며 말한다

매실을 어릴 적에는 약으로 알고

자라서는 술로 알았으나

봄을 부르는 매화 향내를 맡고부터는

봄에는 매화나무라고 부르고

여름에는 매실나무라고 부른다고 한다. *  

* 최두석시집[꽃에게 길을 묻다]-문학과지성사

 

* 성에꽃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 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 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

* 최두석시집[성에꽃]-문지

 

* 노래와 이야기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

처용이 밤늦게 돌아와, 노래로써

아내를 범한 귀신을 꿇어 엎드리게 했다지만

막상 목청을 떼어내고 남은 가사는

베개에 떨어뜨린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하지만 처용의 이야기는 살아남아

새로운 노래와 풍속을 짓고 유전해가리라

정간보가 오선지로 바뀌고

이제 아무도 시집에 악보를 그리지 않는다

노래하고 싶은 시인은 말 속에

은밀히 심장의 박동을 골라 넣는다

그러나 내 격정의 상처는 노래에 쉬이 덧나

다스리는 처방은 이야기일 뿐

이야기로 하필 시를 쓰며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 *

* 정간보-세종 때 창안한 악보. 井자 모양으로 칸을 질러놓고 율명을 기입함.

 

* 그 놋숟가락 

그 놋숟가락 잊을 수 없네
귀한 손님이 오면 내놓던
짚수세미로 기왓가루 문질러 닦아
얼굴도 얼비치던 놋숟가락

사촌누님 시집가기 전 마지막 생일날
갓 벙근 꽃봉오리 같던
단짝친구들 부르고
내가 좋아하던 금례 누님도 왔지

그때 나는 초등학교 졸업반
누님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
굽이굽이 오솔길 안내하던 나에게
날다람쥐 같다는 칭찬도 했지

이어서 저녁 먹는 시간
나는 상에 숟가락 젓가락을 놓으며
금례 누님 자리의 숟가락을
몰래 얼른 입 속에 넣고는 놓았네

 

그녀의 이마처럼 웃음소리 환하던
부잣집 맏며느리감이라던 금례 누님이
그 숟가락으로 스스럼없이 밥 먹는 것
나는 숨막히게 지켜보았네

지금은 기억의 곳간에 숨겨두고
가끔씩 꺼내보는 놋숟가락
짚수세미로 그리움과 죄의식 문질러 닦아
눈썹의 새치도 비추어보는 놋숟가락. *

 

* 대꽃 7 -바위 

  물찬 은어가 영산강 상류로 거슬러 오르다 지느러미 스치는 바위. 노령 산줄기 하나 강물에 부딪쳐 일렁이는 금당 마을의 바위. 어느 날을 기다려 바위는 자라기 시작했다. 담장의 호박이 자라듯이 그러한 속도로 몸 저리며. 그러면서 자기 몸 깊숙이 핏줄을 아로새기고 있었다.

  강물은 몸 부른 바위를 감돌아 몇 십 삭의 나날을 흐르고 이윽고 바위에 균열이 왔다. 점점점 벌어지는 바위 틈으로 비가 내렸다. 쏟아졌다. 천둥 번개 엇갈리던 폭우 몇 달, 강물은 거센 아우성으로 흐르고 마을의 집이 한 채 두 채 무너졌다. 강물에 돼지가 떴다. 바위 몸 조각도 격류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몸조각 하나 둘 셋 넷 다섯...... 마침내 바위가 낳고 있던 아이조차도, 겨드랑이에 날개 돋친 아이조차도 강물에 휩쓸려 갔다. *

 

* 달팽이

  임진강물이 역류해 들어오는 문산천, 초병의 총구가 무심히 햇빛에 빛나는 유월 어느날, 기슭에 수양버들 한 그루, 그 아래 화강암 돌비 하나, 너무 한적해서 간혹 물거품을 터뜨리는 냇물 속에 조용히 잠겨 있던 달팽이 무리, 그 달팽이 무리가 뻘흙 위로 상륙한다.
굼실굼실 기슭의 수양버들 밑둥으로 기어오른다. 제각기 등에 집을 진 채 동둑으로 뻗은 밋밋한 가지를 타고 달팽이의 느릿한 행렬이 이어진다. 마침내 가지 끝에서 온몸을 집 속에 감추고 굴러 떨어진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달팽이는 계속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코를 쥐고 떨어진다. 버들가지 속잎이 파르르 파르르 떨리는 그 아래 풀밭에 떨어진 놈은 다시 물을 찾아 굼실거리고 돌비 위로 떨어진 놈은 당장 깨져 죽는다. 달팽이의 시신이 널어 말려지는 돌비, 돌비에는 핏빛 글씨로 `간첩사살기념비`라 씌여 있다. 그때 초병이 걸어와 돌비 앞에서 거수경례를 붙이고 그의 군화 밑에는 굼실거리던 달팽이 몇 마리 깔려 있다. *

* 최두석시집[성에꽃]-문지

 

* 담양장 
  죽장의 김삿갓은 죽고
  참빗으로 이 잡던 시절도 가고
  대바구니 전성 시절에

  새벽 서리 밟으며 어머니는 바구니 한 줄 이고 장에 가시고 고구마로 점심 때운 뒤 기다리는 오후, 너무 심심해 아홉 살 내가 두 살 터울 동생 손 잡고 신작로를 따라 마중갔었다. 이십 리가 짱짱한 길, 버스는 하루에 두어 번 다녔지만 꼬박꼬박 걸어오셨으므로 가다보면 도중에 만나겠지 생각하며 낯선 아줌마에게 길도 물어가면서 하염없이..... 그런데 이 고개만 넘으면 읍이라는 곳에서 해가 덜렁 졌다. 배는 고프고 으스스 무서워져 한참 망설이다가 되짚어 돌아오는 길은 한없이 멀고 캄캄 어둠에 동생은 울고 기진맥진 한밤중에야 호롱들고 찾아나선 어머니를 만났다. ― 어머니는 그날 따라 버스로 오시고

  아, 요즘도 장날이면
  허리 굽은 어머니
  플라스틱에 밀려 시세도 없는 대바구니 옆에 쭈그려앉아
  멀거니 팔리기를 기다리는
  담양장. *

* 최두석시집[성에꽃]-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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