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낡은 집 - 이용악

효림♡ 2008. 7. 21. 08:27

* 낡은 집 - 이용악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 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모도 모른다

 

찻길이 뇌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 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그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 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고양이 울어 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옥만 눈 우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재산이나 권력도(은동곳과 산호관자는 둘 다 머리 장식으로 쓰이는 물건)  

무곡 - 탈곡하지 않은 곡식을 사다가 방아를 찧은 뒤 다시 파는 장사 일 

둥글소 - '황소'의 함경도 사투리

싸리말 동무 - 싸리비를 말처럼 만들어 같이 놀던 친구 

짓두광주리 - '반짇고리'의 함경도 사투리

저릎등 - 뜨물의 앙금과 겨를 반죽한 것을 겨릅에 발라 말리어 등잔 대신 쓰는 등 

갓주지 이야기 - 아이들의 울음을 달랠 때 들려주던 무서운 옛날이야기 중의 하나. '갓주지.는 절의 갓을 쓴 주지스님 

글거리 - 그루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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