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김광균 시 모음

효림♡ 2009. 3. 5. 08:32

* 설야(雪夜) -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追億)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 한국문학선집[시]-문학과지성사

 

* 와사등(瓦斯燈)

차단ㅡ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ㅡ여름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승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 벙어리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니고 왔기에
길ㅡ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ㅡ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

* 한국문학선집[시]-문학과지성사

 

* 외인촌(外人村)
하이얀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아란 역등(驛燈)을 달은 마차(馬車)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電信柱)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히인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치 위엔
한낮에 소녀(少女)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외인묘지(外人墓地)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다란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村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褪色)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噴水)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

 
* 추일서정(秋日序情)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하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筋骨)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홀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風景)의 장막(帳幕)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


* 은수저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 속을 들여다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
 
* 녹동(綠洞) 묘지에서 
이 새빨간 진흙에 묻히려 여길 왔던가
길길이 누운 황토(荒土) 풀 하나 꽃 하나 없이
눈을 가리는 오리나무 하나 산 하나 없이
비에 젖은 장포(葬布) 바람에 울고
비인 들에 퍼지는 한 줄기 요령 소리
 
서른 여덟의 서러운 나이 두 손에 쥔 채
여윈 어깨에 힘겨운 짐 이제 벗어 놨는가
아하
몸부림 하나 없이 우리 여기서 헤어지는가
두꺼운 널쪽에 못 박는 소리
관을 내리는 쇠사슬 소리
내 이마 한복판을 뚫고 가고
다물은 입술 위에
조그만 묘표(墓標)위에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 황혼  
산은
누구의 무덤이기에
저무는 하늘에 늘어서서
말이 없고나  

 

* 데생
1. 향료를 뿌린 듯 곱단한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먼- 고가선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라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 목련  
목련은 어찌 사월에 피는 꽃일까
창문을 열고 내다보시던
어머니 가신 지도 이제는 10여 년
목련은 해저문 마당에 등불을 켜고
지나는 바람에 조올고 있다 
어머니는 해마다 이맘때쯤 돌아오셔서
꽃피는 마당을 서성거리고
방안의 애기들을 들여다보실까
손수 가꾸신 가지에 봄이 나리고
바람은 먼 곳에 사람 소릴 가져오는데
임자 없는 꽃나무 두엇이
어머니 치맛자락을 에워싸고 있고나
목련은 슬픈 꽃
사월이 오면 나뭇가지 사이로
어머니 백발은 어른거리나
지금쯤은 먼 곳에서
옛 마당에 핀 꽃을 잊지나 않으셨는지 *
 

* 노신(魯迅)  

詩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ㅡ 기적(汽笛)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것의 베게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 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五腸)을 씻어 내린다

노신(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ㅡ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上海)호마로(湖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傷心)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 

 

* 김광균(金光均)시인

-1914~1993 경기도 개성 사람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설야] 당선  
-시집 [와사등][황조가][임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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