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문인수 시 모음

효림♡ 2009. 3. 11. 08:13

* 코스모스들이 배꼽을 잡고 웃는다 - 문인수        

코스모스들이 손뼉 치며 손뼉 치며 죄, 웃는다
구름이 지나가도 새 떼가 지나가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지나가도
수줍게 가만가만 흔들리던 코스모스들이
기차만 지나가면 깔깔깔 배꼽을 잡고 웃는다
기분이 나쁜 기차가 더 빨리 달려가고
코스모스들은 까무러칠 듯 자지러지게 웃는다

 

* "똥끝이 탄다"는 말 
"흐흐, 저놈 똥끝이 타는구나."
할아버지가 웃으며 내게 던진 말이다

그해 여름 시골 외갓집에 갔을 때, 나는 배탈이 났다. 이튿날 저녁밥 먹다 말고  나는 또 꽁무니를 움켜잡은 채 냅다

뒷간(화장실)을 향해 뛰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가족 모두 아슬아슬 기차를 놓칠 뻔한 적도 있고, 나는 또 얼마 전 지각을 할 뻔한 적도 있다

아무튼, 급한 꼴을 당했을 땐 이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다
나는 그날 정말 똥끝이 타는 듯했다
불 당긴 것 같았다 *

 

* 실
나는 그 동안 답답해서 먼 산을 보았다
어머니는 내 양손에다 실타래의 한 쪽씩을 걸고
그걸 또 당신 쪽으로 마저 다 감았을 때
나는 鳶(연)이 되어 하늘을 날았다
밤 깊어 더 낯선 객지에서 젖는 내 여윈 몸이 보인다
길게 풀리면서 오래 감기는 빗소리 *

* 문인수시집[달북]-동학사

 

* 쉬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 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었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 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 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ㅡ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민음사

 

* 빗소리는 길다  

저 긴 빗소리 창을 열고 들어오지 못한다

저 슬피 어둠 속에서 떠돌고 있는 것들이

기억하노니 내 청춘 아닌 것들 없으나

더는 젖지 않겠다

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힘껏 누워 있다

이 긴 빗소리 밤새도록 다 풀려 나간다

 

*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

 

*동백  

섬진강 가 동백 진 거 본다
조금도 시들지 않은 채 동백 져 버린 거
아, 마구 내다버린 거 본다
대가리째 뚝 뚝 덜어져
낭자하구나

나는 그러나 단 한번 아파한 적 없구나
이제 와 참 붉디붉다 내 청춘
비명도 없이 흘러갔다 

 

* 나비
저 긴 수평선, 당신도 입 꽉 다물고
오래 독대한 흔적이 있다
바람 아래 모래 위 우묵한 엉덩이 자국이여
온 몸을 실어 힘껏 눌러앉았던
이 뚜렷한 부재야말로 날개 아니냐
저 일몰 속 어디
어둑어둑 깔리는 활주로가 있다

 
* 달북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않는 먼 어머니,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 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 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 

 

* 낮달이 중얼거렸다   

이 슬픔 중에 낮달이 보인다

저, 뭐라 중얼거린 것 같은데

달구질 소리에 묻힌다

다시 찾으려 하니 정작 잘 보이지 않는다

산 아래, 대낮은 여러 갈래 길이 환한데

더 여러 갈래 마음이 어둡다

구름 옆이었을까

소나무 꼭대기 짬을 뒤져보니 거기 있다

낮달은 내처 간다

분명

인생에 대한 그 무슨 대답인 것 같은데

하늘엔 아무런 지형지물이 없으니

저 어렴풋한 말씀을

한 자리에 오래 걸어두지 못하겠다

또, 달구질 소리에 묻힌다

 

* 그믐달  

저 누군가의 뼈
어두워질수록 그대 아픔
그대만이 잘 보이는
중천의 그믐달

 

* 서쪽이 없다  

지금 저, 환장할 저녁노을 좀 보라고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떴다, 얼른

현관문을 열고 내다봤다, 지척간에도 시차 때문인지

없다, 15층짜리

만촌 보성아파트 107동

기역자 건물이 온통 가로막아 본연의 시뻘건 서쪽이 없다

 

시뻘겋게 녹슬었을 것이다

그 죄 사르지 않는 누구 뒷모습이 있겠느냐

눈물 훔쳐 물든 눈자위, 퉁퉁 부어오른 흉터 같은 것으로 기억하노니

아름다운 여분, 서쪽이 없다

 

말하자면 나는 이미 그대 사는 곳의 서쪽

이 집에 이사 온지도 벌써 십년 넘었다, 인생은 자꾸

한 전망 묻혀버린 줄 모른다. 몰랐다. 다만

금세 어두워져, 저문 뒤엔 저물지도 않는다, 어여쁜 친구여

무엇이냐, 분노냐 슬픔이냐 그 속 뒤집어

널어놓고 바라볼 만한 서쪽이 없다

 

* 오지 않는 절망  

기차는 이제 아주 오지 않는다

지금부터 막 녹슬기 시작한 철길 위에

귀 붙여 들어보니 저 커다란 골짜기

커다랗게 식은 묵묵부답 속으로

계속 사라지는 꼬리가 있다

기나긴 추억이며 고생이며 상처일지라도 결국

망각 속으로 전부 빨려드는 것이냐

석탄층 깊이 깜깜 쌓여가는 것이냐

단풍 산악이 울컥, 울컥,

적막, 적막, 에워싸고 있다. 누구나 하관이 처지고

키가 길쭉해지면서 쓸쓸한 곳 구절리

발밑엔 토끼풀꽃 몇 자주색 뺨이 싸늘하다

가을이 깊으냐, 짐짓 한 번 묻고 서지 않는 장날처럼

떠나야 하리. 무쇠같은 사랑

구절리, 구절리역에다 방치해야 하리

풍장 놓인 노천에서 오래 삭으리라

침목을 베고 누운 환지통의 침묵

뜨겁고 숨 가빴던 날들은 늑골만 앙상하다

막장이며 화전이며 벌목이며 석양에

아흔아홉 굽이 길 구부리던 검은 기차여

오지 않는 절망은 소리가 크지만

그리움이어서 저물도록 시끄럽지 않다

 

* 채석강
채석강의 장서는 읽지 않아도 되겠다
긴 해안을 이룬 바위 벼랑에
격랑과 고요의 자국이 차곡차곡 쌓였는지
種의 기원에서 소멸까지
하늘과 바다가 전폭 몸 섞는 일
그 기쁨에 대해
지금도 계속 저술되고 있는 것인지
또 한 페이지 철썩, 거대한 수평선 넘어오는
책 찍어내는 소리가 여전히 광활하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작은 각다귀들
각다귀들의 분분한 홀레질에도
저 일망무제의 필치가 번듯한 배경으로 있다
이 바닥 모를 깊이를 잴 수 있겠느냐
미친 듯 몸부림치며 헐뜯으며 울부짖는
사랑아, 옆으로 널어 오래 말리는
채석강엔 강이 없어서 이별 또한 없다

 

* 동강에서 울다
동강은 대뜸 말문을 막는다 
어이없다, 참 여러 굽이 말문을 막는다 
가슴 한복판을 뻐개며 비스듬히 빠져나가는 
저기 내려 꽃피고 싶은 기슭이 너무 많다 
몸이 먼 곳 
인생이 저렇듯 아름다울 수 있었겠으나 
어떤 죄가 모르고 자꾸 버렸으리라 
늙은 사내는 엎드려 산 첩첩 울고 
물길은 산에 막히지 않고 간다
* 문인수시집[동강의 높은 새]-세계사

 

* 저수지
소나기 퍼 붓는 날 그를 묻었다
꽃 진 마음 수천수만
연잎들이 시퍼렇게 너풀너풀 뒤덮여 물이 쌓이는
저수지의 둑길을 길게 걸어 나왔다

남의 죽음을 빌려 쓰고 제 마음 적신다

연잎 연잎에, 검은 우산에 몰리는 빗소리가 많다
누군들 이 슬픔의 집대성 아니랴
그리하여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다

 

* 새벽
목탁은 살구나무로 만든다
살구나무의 일생이 송두리째 빠져나가면서
신새벽이 낳는 알일까
대가리 뭉툭한 질문 같은 것이 떠오른다
한 줄로 길게 찢어지는 이 구멍은 또 무엇인가
웃는 눈, 입 같다
거기 귀를 갖다대니
새파란 하늘냄새가 살구 맛 난다

허공은 허공끼리 잘 흘러들고 나는구나
밤새도록 반짝반짝 어둠을 파내던 별들이, 저 향(香)맑은 소리가 전부 목탁 속으로 들어갈 때
예불은 끝나고
만상이 서로 이 닦은 듯 개운하게 다가오는
신새벽. 여명의 고요한 배냇짓을 보라
목탁의 아가미가 숨쉬는 것이다

 

* 산행
나는 그날 가파르고 비좁은 초록숲의 산길을 가다가
혼자 가다가 다시 한 모퉁이 깊이 꺾어 도는데
꽝! 하고 나를 놀라게 한 산벚꽃나무의 폭발
나도 일순간 한꺼번에 있는 대로 다 터져오르는 듯 환하였다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전에 나는 너를 무엇이라
부르며 헤어졌던 것이냐. 아직 끝나지 않은 길 위의
너의 이름, 나의 이름인 이 감옥이여
 

 

* 앉아보소

- 거, 앉아보소
늙은 여자가 강물 물 가까이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다 망가진 채 엉거주춤 돌아온 사내 더러 한 번 말했다. 꺼질 듯 낮게 말했다. 키가 껑충한,

그래서 그런 건지 낯짝 안 보이는, 아직도  허공에 매달려 떠돌고 있는 건지 낯짝 없는, 낯짝 없는 사내 더러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오랜 세월, 장터거리에서 혼자 국밥집을 해 왔다 

저녁노을 그 아래 시뻘겋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러나 쿨럭쿨럭 뒤엉키는 물 

 

지금은 다만 긴 강

 

* 가시연꽃  

방패 같은 커다란 잎이 우포늪 가득 착 발려 있다. 잎의 표면엔 무슨 두드러기 같은 가시가 섬뜩섬뜩 돋아 있는데,

그렇듯 제 뿌리참의 그 무엇을 무섭게 덮어 누르고 있다. 그런데 그걸 또 불쑥 뚫으며 솟아오른 꽃대궁,

창 끝 피칠갑의 꽃봉오리에도 줄기에도 그런 가시가 돋아 있다
저 온갖 적의와 자해의 시간이 오래 무더웠겠다

그러나 누가 말할 수 있으리

마침내 고요히 올라앉은 滿開, 만 개의 캄캄한 문, 만 번은 또 무너지며 신음하며 열어제쳤겠다 악의 꽃, 저 길의



오, 저 고운 웃음에 대해 숨죽여라 지금
소신공양 중이다

 

* 무수한 정적은 와글와글거린다

돌밭에 들어서면 돌들의 뜨거운 몸부림이 인다
그러나 미동도 없이 개별적인 돌들

단단하고도 뾰죽하게 밟히는
유심히 내려다보이는 돌들의 이마에는
터질 듯한 긴장감이 있다
적의의 뿔일까

돌들을 하나씩 뒤집어본다
그 뺨엔
마를 날 없는 날짜들이 깊이 젖어 있다
슬픔으로 된 뿌리인 것 같다

돌을 뽑아 던지면 무섭게 날아간다 번번이
제 앞에 와서 무너지는
또 저를 안고 하염없이 주저앉아 버리는
섬이다. 숨 막히는 돌들은
소리 지르고 싶다 구르고 싶다
망하거나 싸움하거나 춤추고 싶다 몸 비비고 싶다

무수한 정적은 와글와글거린다
이를테면 남대문시장 바닥하고 같다 
 

 

* 문인수시인

-1945년 경북 성주 출생

-1985년 [심상] 신인상 등단, 2007년 미당 문학상 수상

-시집 [ 쉬][동강의 높은 새][배꼽] ...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옛 시조 모음   (0) 2009.03.16
최승자 시 모음  (0) 2009.03.16
김광균 시 모음  (0) 2009.03.05
이성부 시 모음  (0) 2009.03.05
유안진 시 모음  (0) 2009.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