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최승자 시 모음

효림♡ 2009. 3. 16. 08:19

*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비채

 

* 가을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그런데 세월이 내게로 왔습디다

내 문간에 낙엽 한 잎 떨어뜨립디다

 

가을입디다

 

그리고 일진광풍처럼 몰아칩디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

오늘 내 문간에 기어이 휘몰아칩디다 * 

 

*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꽂 
아 
다 
오 *

 

*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러면 내 심장 속 새집의 열쇠를 빌려드릴게요

 

내 몸을 맑은 시냇물 줄기로 휘감아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당신 몸 속을 작은 조약돌로 굴러다닐게요

 

내 텃밭에 심을 푸른 씨앗이 되어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당신 창가로 기어올라 빨간 깨꽃으로 

까꿍! 피어날게요

 

엄하지만 다정한 내 아빠가 되어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너그럽고 순한 당신의 엄마가 되어드릴게요

 

오늘 밤 내게 단 한 번의 깊은 입맞춤을 주시겠어요?

그러면 내일 아침에 예쁜 아이를 낳아드릴게요

 

그리고 어느 저녁 늦은 햇빛에 실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갈 때에

저무는 산 그림자보다 기인 눈빛으로

잠시만 나를 바래다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뭇별들 사이에 그윽한 눈동자로 누워 

밤마다 당신을 지켜봐드릴게요 *

 

* 일찌기 나는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 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민음사

 

* 너에게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다

내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목숨밖에는

 

목숨밖에 팔 게 없는 세상

황량한 쇼윈도 같은 창 너머로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내리고

나는 치명적이다

 

내게, 또 세상에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영혼의 집 쇼윈도는

텅텅 비어 있다

텅텅 비어

박제된 내 모가지 하나만

죽은 왕의 초상처럼 걸려 있다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라고 한다 *

 

* 자화상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예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어리의 슬픔이예요

 

밝은 거리에서 아이들은
새처럼 지저귀며
꽃처럼 피어나며
햇빛 속의 저 눈부신 천성의 사람들
저이들이 마시는 순순한 술은
갈라진 이 혀 끝에는 맞지 않는구나
잡초나 늪 속에 온몸을 사려감고
내 슬픔의 독이 전신에 발효하길 기다릴 뿐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듯
하늘 향해 몰래몰래 울면서
나는 태양에의 사악한 꿈을 꾸고 있다 *

 

* 참 우습다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걸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보다
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

 

* 오 모든 것이 끝났으면

담배도끝나고
커피도끝나고
술도끝나고
목숨도끝나고
시대도끝나고
모든것이끝났으면

 

아버지어머니도끝나고
삼각관계도끝나고
과거도미래도끝나고
이승도저승도끝나고
모든것이끝났으면

 

-영원한단식만이있다면
-영원한無의커튼만이흔들리고있다면

(
그러나그보다는차라리
빨리나를죽여주십시오)

 

* 쓸쓸해서 머나먼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먼 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
짬이 나면 다시 가보는 세계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그 세계 속에서 노자가 살았고
장자가 살았고 예수가 살았고
오늘도 비 내리고 눈 내리고
먼 세계 이 세계

(저기 기독교가 지나가고
불교가 지나가고
道家가 지나간다)

쓸쓸해서 머나먼 이야기올시다 *

* 최승자시집[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

 

*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아직 불기가 남아 있는지
그대의 아궁이와 굴뚝에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지


잡탕 찌개백반이며 꿀꿀이죽인
나의 사랑 한 사발을 들고서

그대 아직 연명하고 계신지
그대 문간을 조심히 두드려봅니다 *
* 최승자시집[내 무덤, 푸르고]-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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