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봄날은 간다 시 모음

효림♡ 2009. 3. 24. 08:21

* 봄날은 간다 - 정일근 
벗꽃이 진다, 휘날리는 벚꽃 아래서
연분홍 치마가 휘날리더라,* 그런 늙은 유행가가 흥얼거려진다는 것,
내 생(生)도 잔치의 파장처럼 시들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늘어진 벚나무 가지 사이로 경축 제40회 진해 군항제 현수막이 보인다
40년이라, 내 몸도 그 세월을 벚나무와 함께 보냈으니
쉽게 마음 달콤해지거나 쓸쓸해지지 않는다

이 나무지? 벚나무 아래서 그녀와 만나는 것을 지켜본 옛 친구는
시들한 내 첫사랑을 추억한다, 벚나무는 몸통이 너무 굵어져버렸다
동갑내기였던 그녀의 허리도 저렇게 굵어졌을 것이다

담배를 피워 물다 말고 친구는 지나가는 말로
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했던 유씨와 류씨 성을 가진 친구들의 뒤늦은 부음을 전한다
친구들의 얼굴이 실루엣으로 떠올랐으나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류씨 성을 가진 친구는 나와 한 책상을 썼는데...... 잠시 쓸쓸해졌으나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이 별에 없다
벚나무 아래서 만났던 첫사랑 그 소녀도 없다
터질 것처럼 뛰는 가슴을 가졌던 열일곱 나도 없다

돌아보면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 잔치가 끝나기도 전에 꽃이 날린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삶에 그냥 스쳐 지나가는 구경꾼일 뿐이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우는**


누구에게도 그런 알뜰한 맹세를 한 적은 없지만, 봄날은 간다
시들시들 내 생의 봄날은 간다 *
 

*, ** - 백설희의노래 [봄날은 간다]에서

 

* 봄날은 간다 - 고은 
이렇게 다 주어버려라
꽃들 지고 있다

이렇게 다 놓아버려라
저녁바다 아무도 붙들지 않는다

바다 층층
쥐치
감성돔
멍게
우럭
광어 농어
새꼬시
할머니 부채 같은 가자미
그 아래층 말미잘의 삶이 있다
삶이란 누누이 어느 죽음의 층층이라고
말할 나위도 없이

지상에 더 많은 천벌이 있어야겠다 봄날은 간다 *

 

* 봄날은 간다 - 안도현

늙은 도둑놈처럼 시커멓게 생긴
보리밭가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는 살구나무에
꽃잎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고 나면 살구나무 가지마다 다닥다닥
누가 꽃잎을 갖다 붙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그가 누구인지
꽃잎을 자꾸자꾸 이어붙여 어쩌겠다는 것인지
나는 매일 살구나무 가까이 다가 갔으나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
나는 흐드득 지는 살구꽃을 손으로 받아들다가
또 입으로 받아먹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어느날 들판 한가운데
살구나무에다 돛을 만들어 달고 떠나려는
한척의 커다란 범선을 보았다
살구꽃 피우던 그가 거기 타고 있을 것 같았다
멀리까지 보리밭이 파도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서 가서 저 배를 밀어주어야 하나
저 배 위에 나도 훌쩍 몸을 실어야 하나
살구꽃이 땅에 흰 보자기를 다 펼쳐놓을 때까지
나는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

* 안도현시집[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비

 

* 봄날은 간다 - 고재종

강변에 참배꽃 피고 
강물에 참배꽃 어리니
너를 사랑한 때처럼
일렁일렁, 세상이 환하더니
강변에 참배꽃 지고
강물에 참배꽃 흐르니
네게 닿지 못한 때처럼
울먹울먹, 가슴이 미어진다
사랑이 오고 가는 동안
외로움은 이만치에서
그리움은 저만치에서
물비늘처럼 반짝이는 것
강변엔 또 어쩌려고
능금꽃 자옥히 일고
강물을 차는 해오라기야
차마 어쩌지 못하고 *

 

* 봄날은 간다 - 이재무

봄날 오후 투명한 햇살
이런 날은 저승의 안방에까지도
훤하게 보일 듯하다.
물 오른 신입생들의 통통 튀는 종아리
반짝이는 소음으로 세상은 청년이 된다.
점심 거르고 전투처럼 치러낸 강의
내 달변의 혓바닥에 실린
진실의 질량은 얼마나 될까.
불쑥 허기 몰려와 몸, 휘청거린다.
먼 곳에서 크고 작은 길들은
꼿꼿이 고개 쳐들고 어디론가 바삐
달리고 있다 내가 뱉어낸 그 많은
장식의 허언들은 붕붕거리며 긴 복도
서성이거나 휴게실 담배연기 자욱한
소음에 갇혀 날개 다친 나비처럼 비틀,
부유하고 있을 것이다.
봄날 오후 햇살은 투명해서
이런 날은 맨살에 비단을 걸쳐도
아플 것이다.
하지만 변한 것은 없다 밥그릇
비워내지 못하는 날이 늘어갈 뿐,
체중은 줄지 않고
누구의 안부도 그리 간절하지가 않다.
꽃처럼 화들짝 피어나 한 순간의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저 웃음의 화원 속으로
아직도 겨울을 다 보내지 못한
두꺼운 몸 밀어 넣으며
물 밖으로 아가미 내민 물고기처럼
헉, 가쁜 숨 몰아쉰다.
모든 게 봄날 투명한 햇살 탓이다.

 

* 봄날은 간다 - 이승훈

낯선 도시 노래방에서 봄날은 간다 당신과 함께 봄날은 간다 달이 뜬 새벽
네시 당신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봄날은 간다 맥주를 마시며 봄날은 간다
서울은 머얼다 손님 없는 노래방에서 봄날은 간다 달이 뜬 거리도 간다 술에
취한 봄날은 간다 안개도 가고 왕십리도 가고 노래방도 간다 서울은 머얼다

당신은 가깝다 내 목에 두른 마후라도 간다 기차는 가지 않는다 나도 가지
않는다 봄날은 가고 당신은 가지 않는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해가 뜨면 같이 웃고 해가 지면 같이 울던 봄날은 간다 바람만 부는 봄날은 간다
글쟁이, 대학교수, 만성 떠돌이, 봄날은 간다 머리를 염색한 우울한 이론가,
봄날은 간다 당신은 남고 봄날은 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 가더라 *

* 봄날은 간다 - 이향아

누가 맨 처음 했던가 몰라
너무 흔해서 싱겁기 짝이 없는 말
인생은 짧은 여름밤의 꿈이라고
짧은 여름 밤의 꿈같은 인생
불꽃처럼 살고 싶어 바장이던 날
누가 다시 흔들어 깨웠는지 몰라
강물은 바다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
실개천 흘러서 바다로 가는 길
엎드려 흐느끼는 나의 종교여,
나를 아직도 용서할 수 있는지.
꽃이 지는 봄,
땅 위에 물구나무 서서
영원의 바다 같은 하늘을 질러
나 이제 길을 떠나도 돌아올 수 있는지,
봄날은 간다.
탈없이 간다.

 

* 봄날은 간다 - 황동규

배가 속력을 늦춘다
제부도 앞바다 봄날 해질녘
꽃불.
바람섬 승봉성 이작섬 벌섬 동백섬
앞에 떠도는 꽃불 서로 먼저 건지려다
옆 섬에게 자리를 내주며 한 발 물러서는 것을 보노라면
마음결 한껏 성글어진다
인간들이 저리 정답게 노는 광경 본 게 언제지?
빗물 얼룩진 유리 훔치듯
눈을 훔치면
수평선이 섬들 사이로 홍옥 끈처럼 흘러 들어와
섬의 허리들을 가볍게 맨다
자 허리의 끈을 당겨라!
학처럼 날기 시작하는 섬들
쿵쿵대는 바다의 심장 박동
이 순간만은
신의 눈길과 인간의 눈길 가르기 힘들리
눈길 서로 헷갈릴까
인간의 눈을 잠시 시야 밖으로 밀어놓는다

 

* 봄날은 간다 - 기형도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착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은 무서울이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는 몇 장 지전 속에 구겨지는데 *

 

* 봄날은 간다 - 이외수 
부끄러워라
내가 쓰는 글들은
아직 썩어 가는 세상의
방부제가 되지 못하고
내가 흘린 눈물은
아직 고통받는 이들의
진통제가 되지 못하네
돌아보면 오십 평생
파지만 가득하고
아뿔사
또 한 해
어느 새 유채꽃 한 바지게 짊어지고
저기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봄날이여
* 이외수시집[그리움도 화석이 된다]-동문선

 

* 봄날은 간다 - 조용미
내가 보낸 삼월을 무엇이라 해야 하나
이월 매화에 춘설이 난분분했다고, 봄비가 또 그 매화 봉오리를 적셨다고
어느 날은 춘풍이 하도 매워 매화 잎을 여럿 떨어 뜨렸다고

하여 매화 보러 길 떠났다 바람이 찬 하루는
허공을 쓸어 담듯 손을 뻗어 빈손을 움켜쥐어보며
종일 누워 있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저 한 순간과 다음 순간 사이의 빈틈에서
별똥별이 두 번이나 떨어졌다고 해야 하나
무슨 귀하고 애틋한 것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저 별똥별이

몸을 누이고 있었던 그 적막한 날의 客窓으로

한 번은 길게 또 한 번은 짧게 안으로 쏟아지듯 스러졌다고 말해야 할지

내가 알 수 없는 그 일이 여러 날 마음을 지그시 누르며
어릿어릿 사람을 아프게 했다고 할까


내가 보낸 삼월은 그리하여 그늘도, 꽃도, 적막함도, 가파름도 함께였는데
삼월이 간다고, 괜히 봄비 내리는 저녁을 탓한다네
별똥별이 떨어진 그날 무엇이 내게로 와 사라진다 말한 건지

긴 저녁의 빗소리로 삼월을 마저 보내면
나는 또 누구의 눈앞에서 별똥별 같은 것이 되어


삼월이 아주 간다고 그렇게 말하며 스러지게 되는걸까
내게 그리움이 찾아들었다고, 서러움이 다시 시작 되었노라고
알 수 없는 가파른 그 높이를 천천히 한 걸음씩 다 걸어가보아야 할 거라고
나는 내게 나지막이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속삭일 뿐 *

* 조용미시집[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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