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손택수 시 모음

효림♡ 2009. 5. 22. 07:58

* 방심(放心) - 손택수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 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 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

* 손택수시집[목련 전차]-창비 

 

* 털신 
토방 아래 늙은 개가 쥔 할머니 고무신을 깔고 잔다 마실 갔다 와서 탈탈 털어논 고무신을 제 새끼를 품듯 품고 잔다

눈이 내리는데, 올겨울은 저렇게 몇 날 며칠 눈만 내리고 있는데

고뿔이라도 들었는지 콧물을 훌쩍거리면서, 뚝 뚝 댓가지 꺾어지는 소리에 가끔씩 귀를 쫑긋거리기도 하면서

뒤꿈치를 꿰맨 고무신에 축 처진 배를 깔고 잔다 차디찬 고무신에 털가죽을 대고 잔다

 

* 아내의 이름은 천리향

세상에 천리향이 있다는 것은

세상 모든 곳에 천리나 먼

거리가 있다는 거지

한 지붕 한 이불 덮고 사는

아내와 나 사이에도

천리는 있어

등을 돌리고 잠든 아내의

고단한 숨소리를 듣는 밤

방구석에 처박혀 핀 천리향아

네가 서러운 것은

진하디진한 향기만큼

아득한 거리를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지

얼마나 아득했으면
이토록 진한 향기를 가졌겠는가
향기가 천리를 간다는 것은
살을 부비면서도
건너갈 수 없는 거리가
어디나 있다는 거지
허나 네가 갸륵한 것은
연애적부터 궁지에 몰리면 하던 버릇
내 숱한 거짓말에 짐짓 손가락을 걸며
겨울을 건너가는 아내 때문이지
등을 맞댄 천리 너머
꽃망울 터지는 소리를 엿듣는 밤
너 서럽고 갸륵한 천리향아 *

 

* 동백 사원  

 동백이 무슨 쇠종이라도 된다는 듯이 눈보라가 꽃망울

을 치고 간다 겹겹이 뭉친 망울 속엔 동박새 울음이 들었

고, 가지를 쥐고 흔들던 시월의 서리 묻은 바람이 들었고,

한 방울 머릿기름을 얻기 위해 눈보라 속을 걸어오던 발

소리가 들었다 

 

 묵언에 든 동백을 찾아 기억에도 없는 무슨 인연인가에

이끌려 땅끝까지 내달려온 길 둘 데 없는 마음은 미황사

처마처럼 벌어지는 꽃송이와 함께 얼어붙은 대기라도 살

짝 밀어젖혀보고 싶은데 

 

멀리 꽃향기를 날리는 대신 다리에 쇳덩이 추를 달고

떨어지는 독한 것, 동백은 죽어 제 그늘 위에서 다시 피어

나는 꽃이다 산문을 닫아건 채 자신의 중심을 물들이며

추락하는 저 얼얼한 꽃빛이 땅땅 쇠종 소리를 낸다 *

* 손택수시집[나무의수사학]-실천문학사

 

* 모과  

아파트 화단에 떨어져 있던 모과를 주워왔다
올겨울엔 모과차를 마시리라,
잡화꿀에 절여 쿨룩이는 겨울을 다스려보리라
도마에 올려놓고 쩍 모과를 쪼개는데
잘 익은 속살 속에서
애벌레가 꾸물거리며 기어나온다
모과 속살처럼 노래진 애벌레가
단잠을 깨고 우는 아이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애벌레에게 모과는 인큐베이터 같은 것
눈 내리는 겨울밤
어미 대신 자장가를 불러줄 유모의 품과 같은 것
이미 쪼개버린 모과를 다시 붙여놓을 수도 없고,
이 쌀쌀한 철에 애벌레를 업둥이처럼 내다버릴 수도 없고
내가 언제부터 이깟 애벌레 한 마리를 두고 심란해했던가
올겨울 나는 기필코 모과차를 마시리라,
짐짓 무심하게 아내를 바라보는데
아직도 책장 어딘가에 심장이 멎은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간직하고 있는,
놓쳐버린 아기의 태기를 놓지 못하고 있는 모과
속을 드러낸 거죽에 검은 주근깨가 숭숭하다
수술실에서 나올 때 흐느끼는 내 어깨를 말없이 안아주던 너
칼자국 지나간 몸 더 거칠어가는 줄 모르고
바깥으로만 바깥으로만 떠돌던 날들이 있었는데
날을 세운 불빛에 움찔거리는 애벌레처럼 허둥거리는 한때
빈속에 쟁인 울음이 아린 향을 타고 흘러나온다 *

* 손택수시집[나무의수사학]-실천문학사

 

* 광화문 네 거리엔 전광판이 많다  

비가 오려나,
하늘을 보는데
옥외 전광판이 보인다
풀 컬러 고해상도로
발광하는 건물들
시사뉴스와 광고와 스포츠 영상을 끝없이
전송하고 있다
잠시도 무료할 틈이 없는 거리
저물어가는 노을 대신 화려하게
명멸하는 이미지들을 따라가기 바쁘다
언젠간 밤하늘 별을 보면서도
뉴스나 광고를 생각하겠구나

광고 하나 나 하나

광고 둘 나 둘
리모컨으로 꾸욱 눌러 꺼버릴 수도 없는 전광판을 헤며
밤을 지새우기도 하겠구나
신호등 앞에서 잠시 넋을 잃고 있는 이마 위로 투둑
빗방울이 떨어진다
(11시 현재 누적 당첨금 75억 3천만 원
당신에게도 옵니다, 로또)
지나가는 광고 문구를 애무하며 주르룩
미끄러져 내리는 빗방울
허공에서부터 고해상도로
발광하고 있다
 *

* 2005년 애지문학상 수상시 

* 손택수시집[나무의수사학]-실천문학사

 

* 부처바위 
경주 남산 스님 한 분 바위 속에 갇혀 있다. 반야나무 망고나무 잎 아래 결가부좌 튼 채 안으로 금이 가고 금길 따라 빗물이 흘러드는 소리를 엿듣고 있다. 죽어서 바위는 모래알을 남기고 고승은 사리알을 남긴다는데..... 천년 비바람에 가사 옷주름이 지워지고 얼굴선이 희미해지면서 둘은 이제 어지간히 닮아도 보인다. 그러나 바위가 사리알이 되기까지, 스님이 모래알이 되기까지 크낙한 저 침묵은 또 천년을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선정에 든 바위에서 흐르는 눈물, 모래 쓸리는 소리가 아릿하다.

 

* 연꽃 에밀레

연꽃잎 위에 비가 내려 친다

에밀레종 종신에 새겨진 연꽃을

당목이 치듯, 가라앉은

물결을 고랑고랑 일으켜 세우며 간다

수심을 헤아릴 길 없는, 끔찍하게 고요한

저 연못도 일찍이 애 하나를 삼켜버렸다

애 하나를 삼키고선 단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

어린 내가 아침마다 밥 얻으러 오던

미친 여자에게 던지던 돌멩이처럼

비가 내려칠 때마다 연꽃

꾹 참은 아픔이 수면 위로 퍼져나간다

당목이 종신에 닿은 순간 종도

저처럼 연하게 풀어져 떨고 있었으리라

에밀레 에밀레 산발한 바람이

수면에 닿았다 튀어오른

빗줄기를 뒤로 힘껏 잡아당겼다


* 앙큼한 꽃
이 골목에 부쩍
싸움이 는 건
평상이 사라지고 난 뒤부터다

평상 위에 지지배배 배를 깔고 누워
숙제를 하던 아이들과
부은 다리를 쉬어가곤 하던 보험 아줌마

국수내기 민화투를 치던 할미들이 사라져버린 뒤부터다
평상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동백 화분이 꽃을 피웠다
평상 몰아내고 주차금지 앙큼한 꽃을 피웠다
 

* 은행나무 사리알  

아랫배에 끙 힘을 주고 밀어낸 열매들이 온 천지를 잘 익은 된장 냄새 황금빛으로 물들여준다

동제가 있을 때면 한 상 걸게 차려놓고 밥을 먹던 은행나무 고목

 

사리알이 별것이간디, 언젠가 수덕사 성보박물관에서 본 滿空 스님 바리때도 저 은행나무 재목이었다

포개진 그릇마다 은행나무 가지 사이에나 들어와 있을 법한 만공이 가득 차 있었다

 

스님도 한 그루 은행나무로 살다 간 것이 아닐까

아픔 몸 속에 들어와 입적한 목숨들을 품고 잘 익은 똥내음, 사리알 맺는 일에 한 평생을 보내고 간 것이 아닐까

 

은행나무 더부룩한 아랫배가 다 개운하다는 듯 가볍게 몸을 흔든다

앗따 뭘 퍼먹었길래 이렇게 독한고, 똥 푸러 온 인부처럼 코를 쥐고 마을 사람들이 푸지게 퍼질러 놓은 알들을 줍는다 *

 

* 오동나무 지팡이

오동나무 짙은 잎그늘이 어리자 담벼락이 일렁인다

담벼락 아래 계단이 딱딱하게 굳은 관절을 꺾었다 펴며 술렁거린다

저 그늘 속엔 얼마 전까지 노파가 혼자서 앉아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나와  해종일 우멍하게 깊은 눈구멍으로

오가는 이들을 무연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거동도 없이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을

그늘 깊숙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마도 가끔씩 들려오는 마른기침 소리만 아니었다면

아무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으리

노파의 소매 스적이는 소리와 잎그늘

뒤척이는 소리가 한몸이 되어 들려오던 골목길

언젠가 나뭇잎 그늘이 가만히 어깨에 손을 얹어왔을 때

이봐 젊은이, 손을 얹고 알아들을 수 없는 수화를 건네 왔을 때

나는 어깨죽지가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꼈는지 모른다

빛이 감춰둔 늪 속에라도 빠져들 듯 더럭 겁을 집어먹었는지 모른다

녹물을 끼얹은 나뭇잎 하나가 남은 햇살을 그러쥐고

작심한 듯이 뚝 떨어져내릴 무렵

떨어져내린 나뭇잎이 제 그늘과 바싹 붙어서

바쁘게 오가는 발길들에 바삭바삭 부서져내리고 있을 무렵

자리를 뜬 노파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이듬해 밑동에서 어린 가지 하나만이 쑥 올라왔다

허리 구부정한 나무가 짙은 지팡이였다 *

* 손택수시집[호랑이 발자국]-창비

 

* 호랑이 발자국  

가령 그런 사람이 있다고 치자
해마다 눈이 내리면 호랑이 발자국과
모양새가 똑같은 신발에 장갑을 끼고
폭설이 내린 강원도 산간지대 어디를
엉금엉금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눈 그친 눈길을 얼마쯤 어슬렁거리다가
다시 눈이 내리는 곳 그쯤에서 행적을 감춘
사람인 것도 같고 사람 아닌 것도 같은
그런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래서

남한에서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들갑을 떨며 사람들이 몰려가고
호랑이 발자국 기사가 점점이 찍힌
일간지가 가정마다 배달되고
금강산에서 왔을까, 아니 백두산일 거야
호사가들의 입에 곶감처럼 오르내리면서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이 복고풍 유행처럼 번져간다고 치자

아무도 증명할 수 없지만, 오히려 증명할 수 없어서
과연 영험한 짐승은 뭐가 달라도 다른 게로군
해마다 번연히 실패할 줄 알면서도
가슴속에 호랑이 발자국 본을 떠오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고 치자 눈과 함께 왔다
눈과 함께 사라지는, 가령
호랑이 발자국 같은 그런 사람이 *

* 손택수시집[호랑이 발자국]-창비

 

* 대추나무 신랑
햇볕에 잘 익은 사내 아이의 불알
빨갛고 탱탱한 대추가 주렁주렁하다
여든 가깝도록 친손주를 보지 못한 외가댁
할머니의 할머니의 그
할머니가 심었다는 대추나무
고목은 예전처럼 올해도
씨알 굵은 외손주 하나를 장가보냈을까
촉촉이 젖은 그늘 속에 불쑥
꼬마신랑 잠지를 꺼내놓고
자라야, 자라야, 고개를 내놓아라
안 내놓으면 구워먹고 말겠다
가랑이가 더 잘 벌어지라고
가지 사이에 옹골찬 돌멩이도 하나 끼워주고
물오른 나뭇가지 하얀 속살을 살살 문질러주며
청상의 이모들은 남의 신혼방을 훔쳐보듯
풋, 풋, 풋, 풋대추 이파리처럼 마냥 하늘거렸을까
차르르 탬버린 소리를 내는 햇살 아래
동정을 바친 나의 신부, 한 그루는
이십수년 전 이심전심이 되어서
밤마실을 와서 자고 가던 이웃 할머니들처럼
박복한 신세타령으로 궁시렁 궁시렁거리다가
아가가 네가 내 서방이로구나, 새신랑이로구나
서로 품고 자겠다고 다투며 깨득거리다가
한정없이 꺼져들어가던 품속
그 애진 품속처럼, 빨면은 송아리 송아리
하얀 꽃잎이 비릿하게 맺힐 것도 같고

 

* 아버지의 등을 밀며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 번은 입 속에 준비해 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어쩔 줄 모르고 물 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 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 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 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 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 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 화살나무
언뜻 내민 촉들은 바깥을 향해
기세좋게 뻗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제 살을 관통하여, 자신을 명중시키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모여들고 있는 가지들

자신의 몸 속에 과녁을 갖고 산다
살아갈수록 중심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동심원, 나이테를 품고 산다
가장 먼 목표물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으니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는, 시윗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산길 위에서

 

* 서해는 사막을 기른다 
파도에 밀려온 모래가 깔깔하게 햇빛에 마르면
바람이 신두리까지 곧장 실어다 나른다
신두리에서 바람이 더 나아가지 않고 쉬는 이유는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태안반도 한쪽에선
듬성듬성 초목들이 자라는 것이고
근육질의 뿌리들이 어깨를 겯고 촘촘하게
모래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목말라서 목마름 속으로
목마름을 씻으러 맹렬하게
사막 속으로 뻗어들어가는 서해
제 불모를 앙버티는 자들
뽑으려 들면 완강하게 저항하는 풀들
그 푸르른 근력이 당차게 모래바람을 끄집어당긴다
끄집어당긴 서해, 격렬비열도를 지나온
파도가 기필코 태안에 닿는 이유이다 *


* 폭포

벚꽃이 진다 피어나자마자

태어난 세상이 절벽이라는 것을

단번에 깨달아버린 자들, 가지마다 층층

눈 질끈 감고 뛰어내린다

안에서 바깥으로 화르르

자신을 무너뜨리는 나무

자신을 무너뜨린 뒤에야

절벽을 하얗게 쓰다듬으며 떨어져 내리는

저 소리없는 폭포

 

벚꽃나무 아래 들어

귀가 얼얼하도록 매를 맞는다

폭포수 아래 득음을 꿈꾸던 옛자객처럼

머리를 짜개버릴 듯 쏟아져내리는

꽃의 낙차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서  

* 손택수시집[호랑이 발자국]-창비

 

* 모기 禪에 빠지다
*죽비(竹扉)

열대야다 바람 한 점 들어올 창문도 없이 오후 내내 달궈놓은 옥탑방
허리를 잔뜩  구부러트리는 낮은 천장 아래 속옷이  후줄근하게 젖어
졸다 찰싹, 정신을 차린다  축축 늘어져가는 정신에 얼음송곳처럼

끔 침을 놓고 간 모기 

 

*불립문자(不立文字)

지난 밤 읽다 만 책장을 펼쳐보니  모기 한 마리  납작하게 눌려 죽어
있다 이 뭣꼬, 후 불어냈지만 책장에 착 달라붙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체액을 터트려서 활자와 활자  사이에 박혀 있는 모기,  너도
문자에  눈이 멀었더냐 책장이 덮이는 줄도 모르고 용맹정진  문자에
눈 먼 자의 최후를 그렇게 몸소 보여주는 것이냐 책속의 활자들이

뭣꼬, 모기 눈을 뜨고 앵앵거린다

 

*향(香)

꼬리부터 머리까지 무엇이 되고 싶으냐  짙푸른 독을 품고 치잉칭

아리 튼 몸을 토막토막  아침이면 떨어져 누운 모기와 함께  쓰레받기
속에 재가 되어 쓸려나가는 배암의 허물

 

*은산철벽(銀山鐵壁)

찬바람이 불면서 기력이 다했는가 은빛 날개 날쌘 몸놀림이 슬로우모션으로

바람 한 줄에도 휘청거린다 싶더니, 조금 성가시다 싶으면 그 울음소

엄지와 집게만을  가지고도 능히  끌 수 있다 싶더니,  갈수록
희미해져가는 울음소리,  사라진 그쯤에서 잊고 살던 시계 초침 소리
가 들려온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  간간

앓아 누우신  아버지의 밭은기침 소리도 계단을 타고 올라온다

많은 소리들을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다니

* 2000년 수주문학상 당선작

 

* 손택수시인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당선, 2003년 현대시동인상 수상

-시집 [호랑이 발자국][목련 전차][나무의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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