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뜨거운 밤 - 안도현

효림♡ 2009. 6. 3. 08:50

* 뜨거운 밤 - 안도현 
아, 고 잡것들이 말이여, 불도 한 점 없는 거 뭣이냐 깜깜한 묏똥가에서 둘이서 불이 붙어가지고는 누가 왔는지,
누가 지나가는지, 누가 쳐다보는지 모르고 말이여,  여치는 싸랑싸랑 울어댔쌓는디 내가 어떻게 놀라부렀는가 첨에는 참말로 산 귀신들이 아닌가 싶어  대가리 털이 바짝 서두만 가만히 본께 두 년놈들이 깨를 홀라당 벗고는 메뚜기같이 착싹 붙어가지고는 일을 벌이는디, 하이고매,  숨이 그만 탁 막혀 나는 말도 못 하고 소리도 못 지르겠고 그런다고 좋은 구경 놔두고 꽁무니 빼기도 그렇고

마른침을 꼴딱 삼켜가면서 눈알이 빠져라 쳐다보는디 글쎄, 풀들이 난데없이 야밤에 짓뭉개져가지고는 푸르딩딩 멍든 자죽처럼 짓뭉개졌을 풀 들이 말이여, 싸아한 냄새를 피워올리는 바로 고것들이 무슨 죄일까 싶어, 나 참 별 생각도 다 해봤는디 말이여, 그 때 말이여 반딧불 하나가 눈을 깜빡깜빡하면서 싸가지 없이 나를 빤히 보고있었던 거 아니겄어, 한마디로 챙피하두만

눈을 깜빡깜빡하면서, 내가 벌겋게 달아오른 것을 지가 다 봤을거 아녀, 처음부터 끝까지 저도 다 보고 있었으면서 말이여,

하이고매 

* 안도현시집[바닷가 우체국]-문학동네

 

* 낭만주의

저 변산반도의 사타구니 곰소항에 가면
바다로부터 등 돌린 폐선들,
나는 그 낡은 배들이 뭍으로 기어오르고 싶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뭣이? 바다가 지겹다고?
나는 시집을 내고 받은 인세를 모아서
바다에 발 묶인 배 한 척을 샀던 것이다

세상에, 아직도 시를 읽는 사람이 있나, 하고
너는 마치 고장난 엔진처럼 툴툴거리겠지
하지만 말이야, 배를 천천히 뭍으로 올려놓는 순간,
그 어둡던 바다도 배도 단번에 환해졌단다
그때 덩달아 끼룩끼룩 울어준 것은 갈매기들이었고

너는 이해할 수 없다고, 바다만 바라보겠지
나는 배를 데리고 갈 방도를 생각하느라
20년 동안이나 끙끙대며 시를 쓴 것 같다
배를 분해해서 옮기는 일은 재미가 없을 테고
트럭 짐칸에다 배를 통째로 태우는 건 우스꽝스런 짓이지

그래서 밀고 가기로 한 것이다
귓불이 연하고 빨간 아이들이 조기떼처럼 재잘대며 배를 따라왔던 거야
생각해봐, 여러 개의 손들이 한꺼번에 배를 민다고 생각해봐
배도 힘이 났던 거야

국도를 타고 가다가
지치면 미끄러운 보리밭으로도 가고.....
배를 밀고 가는 나를 보았다면, 너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핑계를 대거나, 미친 짓이라며 손가락질했겠지
나는 배를 잠시 멈추고 네 귓구멍이 뻥 뚫리도록 뱃고동을 울려주었을 거야
시를 읽는 시간에 자신을 투자할 줄 모르는 인간하고는
놀지 않겠다, 절교다, 하고 말이야

나는 장차 배를 밀어 산꼭대기에 올려놓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배를 산꼭대기로 밀고 올라가느냐고?
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시인이거든
내가 항해사였다면 배를 데리고 수평선을 꼴깍, 넘어갔을 거야 *

* 안도현시집[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현대문학북스

 

* 이른 봄날

이른 봄날, 앞마당에 쌓인 눈이

싸묵싸묵 녹을 때 가리

나는 꼭 그러쥐었던 손을 풀고

마루 끝으로 내려선 다음,

질척질척한 마당을 건너서 가리

내 발자국 소리 맨 먼저 알아차리고

서둘러 있는 힘을 다해 가지 끝부터 흔들어보는

한 그루 매화나무한테로 가리 *

* 안도현시집[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현대문학북스

 

* 봄똥

봄똥, 생각하면

전라도에 눌러앉아 살고 싶어진다

 

봄이 당도하기 전에 봄똥, 봄똥 발음하다가 보면

입술도 동그랗게 만들어주는

봄똥, 텃밭에 나가 잔설 헤치고

마른 비늘 같은 겨울을 툭툭 털어내고

 

솎아 먹는

봄똥, 찬물에 흔들어 씻어서는 된장에 쌈 싸서 먹는

봄똥, 입 안에 달싸하게 푸른 물이 고이는

봄똥, 봄똥으로 점심밥 푸지게 먹고 나서는

 

텃밭가에 쭈그리고 앉아

정말로 거시기를 덜렁덜렁거리며

한 무더기 똥을 누고 싶어진다 *

* 안도현시집[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현대문학북스

 

* 가을 산

어느 계집이 제 서답을 빨지도 않고

능선마다 스리슬쩍 펼쳐놓았느냐

 

용두질 끝난 뒤에도 식지 않은, 벌겋게 달아오른 그것을

햇볕 아래 서서 꺼내 말리는 단풍나무들 *

* 안도현시집[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현대문학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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