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비 - 신경림
젖은 나뭇잎이 날아와 유리창에 달라붙는
간이역에는 찻시간이 돼도 손님이 없다
플라타너스로 가려진 낡은 목조 찻집
차 나르는 소녀의 머리칼에서는 풀냄새가 나겠지
오늘 집에 가면 헌 난로에 불을 당겨
먼저 따끈한 차 한 잔을 마셔야지
빗물에 젖은 유행가 가락을 떠밀며
화물차 언덕을 돌아 뒤뚱거리며 들어설 제
붉고 푸른 깃발을 흔드는
늙은 역무원 굽은 등에 흩뿌리는 가을비 *
*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靑龍) 흑룡(黑龍)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 신경림시집[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랜덤하우스
* 낙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 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
* 신경림시집[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랜덤하우스
* 뗏목
뗏목은 강을 건널 때나 필요하지
강을 다 건너고도
뗏목을 떠메고 가는 미친놈이 어데 있느냐고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빌려
명진 스님이 하던 말이다
저녁 내내 장작불을 지펴 펄펄 끓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운 절방
문을 열어 는개로 뽀얀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곰곰 생각해본다
혹 나 지금 뗏목으로 버려지지 않겠다고
밤낮으로 바둥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 나 지금 뗏목으로 버려야 할 것들을 떠메고
뻘뻘 땀 흘리며 있는 것은 아닐까 *
* 떠도는 자의 노래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
* 신경림시집[뿔]-창비,2002
* 매화를 찾아서
구름떼처럼 모인 사람들만 보고 돌아온다
광양 매화밭으로 매화를 보러 갔다가
매화는 덜 피어 보지 못하고
그래도 섬진강 거슬러 올라오는 밤차는 좋아
산허리와 들판에 묻은 달빛에 취해 조는데
차 안을 가득 메우는 짙은 매화향기 있어
둘러보니 차 안에는 반쯤 잠든 사람들뿐
살면서 사람들이 만드는 소음과 악취가
꿈과 달빛에 섞여 때로 만개한 매화보다도
더 짙은 향내가 되기도 하는 건지
내년 봄에도 다시 한번 매화 찾아 나섰다가
매화는 그만두고 밤차나 타고 올라올까 *
*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
환한 봄 햇살 꽃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
날아가듯 달려가 내가 할 일이 무언가
예순에 더 몇 해를 보아온 같은 풍경과 말들
종착역에서도 그것들이 기다리겠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역에서 차를 버리자
그리고 걷자 발이 부르틀 때까지
복사꽃숲 나오면 들어가 낮잠도 자고
소매 잡는 이 있으면 하룻밤쯤 술로 지새면서
이르지 못한들 어떠랴 이르고자 한 곳에
풀씨들 날아가다 떨어져 몸을 묻은
산은 파랗고 강물은 저리 반짝이는데 *
* 돌 하나, 꽃 한 송이
꽃을 좋아해 비구 두엇과 눈 속에 핀 매화에 취해도 보고
개망초 하얀 간척지 농투성이 농성에 덩달아도 보고
노래가 좋아 기성화장수 봉고에 실려 반도 횡단도 하고
버려진 광산촌에서 중로(中老)의 주모와 동무로 뒹굴기도 하고
이래서 이 세상에 돌로 버려지면 어쩌나 두려워하면서
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 꿈도 꾸면서 *
* 신경림시집[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랜덤하우스
* 장미에게
나는 아직도 네 새빨간
꽃만을 아름답다 할 수가 없다
어쩌랴, 벌레 먹어 누렇게 바랜
잎들이 보이는데야
흐느끼는 귀뚜라미 소리에만
흘릴 수가 없다
다가올 겨울이 두려워
이웃한 나무들이
떠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꽃잎에 쏟아지는 달빛과
그 그림자만을
황홀하다 할 수가 없다
귀기울여 보아라
더 음산한 데서 벌어지는
더럽고 야비한 음모의 수런거림에
나는 아직도
네 복사꽃 두 뺨과
익어 터질 듯한 가슴만을
노래할 수가 없다.
어쩌랴, 아직 아물지 않은
시퍼런 상처 등뒤로 드러나는데야
애써 덮어도 곪았던 자욱
손등에 뚜렷한데야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
* 신경림시집[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랜덤하우스
* 평안향 - 흑룡강성의 한 조선족 자치향.
* 신경림시집[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랜덤하우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이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우러지는
사람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이 아니듯
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듯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모두 흰 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깨로 바람 맞받아치며 사는 것은 아니다 *
* 신경림시집[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랜덤하우스
* 늙은 소나무 - 밀양에서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여자를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사랑을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세상을 안다고
늙은 소나무들은
이렇게 말하지만
바람소리 속에서
이렇게 말하지만
* 동해바다 -후포에서*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 하게
동산만 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보다
멀리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
* 후포는 울진 아래 있는 작은 어항이다.
* 신경림시집[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랜덤하우스
* 그 여름
한 사람의 울음이
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고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고을에 노래를 몰고왔다
구름을 몰고오고
바람과 비를 몰고왔다
꽃과 춤을 불러오고
저주와 욕설과 원망을 불러왔다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몰고오고
한 사람의 죽음이
온 나라에 죽음을 불러왔다
* 까치소리
간밤에 얇은 싸락눈이 내렸다
전깃줄에 걸린 차고 흰 바람
교회당 지붕 위에 맑은 구름
어디선가 멀리서 까치 소리
싸락눈을 밟고 골목을 걷는다
큰길을 건너 산동네에 오른다
습기찬 판장 소란스런 문소리
가난은 좀체 벗어지지 않고
산다는 일의 고통스러운 몸부림
몸부림 속에서 따뜻한 손들
뜰판에 팽개쳐진 이웃들을 생각한다
지금쯤 그들도 까치 소리를 들을까
소나무숲 잡목숲의 철 이른 봄바람
학교 마당 장터 골목 아직 매운 눈바람
싸락눈을 밟고 산길을 걷는다
철조망 팻말 위에 산뜻한 햇살
봄이 온다고 봄이 온다고
어디선가 멀리서 까치 소리
* 신경림(申庚林)시인
-1936년 충북 충주 출생
-1956년 [문학예술]에[갈대]로 등단, 만해문학상, 단재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상 수상
-시집 [농무][새재][달넘세][남한강][가난한 사랑의 노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