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망증 - 정양
창문을 닫았던가
출입문은 잠그고 나왔던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자꾸만 미심쩍다
다시 올라가 보면 번번이
잘 닫고 잠가놓은 것을
퇴근길 괜한 헛걸음이 벌써
한두 번이 아니다
그냥 내려왔다 누구는
마스크를 쓴 채로 깜박 잊고
가래침도 뱉는다지만 나는
그런 축에 낄 위인도 못된다
혼자 남은 주막에서
술값을 치르다가 다시 미심쩍다
창문을 닫은 기억이 없다
출입문 잠근 기억이 전혀 없다
전기코드도 꽂아둔 채로
그냥 나온 것 같다
다들 가고 없지만 누구와도
헤어진 기억이 없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보통 일이냐
매일같이 닫고 잠그고 뽑는 것이
보통 일이냐, 그래, 보통 일이다
헤어진 기억도 없이
보고 싶은 사람 오래오래
못 만나고 사는 것도 보통 일이다
망할 것들이 여간해서 안 망하는 것쯤은
열어놓고 꽂아놓고 사는 것쯤은
얼마든지 보통 일이다
닫고잠그고가고보고싶고
다 보통 일이다 술기운만 믿고
그냥 집으로 간다 집에서도 다시
닫고잠그고뽑고마시고끄고그리고
깜박깜박 그대 보고 싶다 *
* 정양시집[살아있는 것들의 무게]-창비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
* 봄비
숨 막힐 듯 숨소리 죽인
새벽 봄비 온다
속옷까지 젖도록 속속들이
숨을 죽이고
봄비는 저렇게
숨 막히게 누굴 보고 싶은가 보다
*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뉘우칠 일 죄로 갈 일로
망설이다 가슴 조이다 마침내
아무 일도 없었던 이들
아무 일도 없이
가슴 쓸어내리는 이들 보라고
어디 한번 일 저질러보라고
꼬리를 물고 봄꽃들 핀다
아름답고 슬픈 거짓말들이
산수유 개나리 살구꽃 진달래처럼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 하늘빛 짙푸를수록
애당초 이 강물에는
하늘빛이 담기질 않는다
하늘빛 짙푸를수록
강물은 더 누렇다
하늘은 하늘이고
강물은 강물일 뿐
어느 지평선으로도
하늘을 옮기는 법이 없다
하늘빛 짙푸를수록
하늘은 더 야속하다는 걸
태초부터 이 강물은
뼈저리게 알았나보다
* 눈 오는 날
낮잠을 자다가
잘못 걸린 전화를 받는다
무슨 지랄로 집구석에만 자빠졌느냐
나잇살이나 넉넉히 들어 보이는
술 취한 목소리가
해라쪼로 나를 당장 나오라고 한다
여기는 군산집, 세상에는 지금
눈이 쌓였다고 한다 눈이
펑펑펑펑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펑펑펑펑 쏟아지던
그 목소리를 찾아 나선다
금방 찾아낼 것 같은 그 목소리는
눈 내리는 군산집은, 눈 내리는
이 도시의 어디쯤이냐
술 취한 눈을 맞으며
기웃거리는 골목길마다 사람들이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해라쪼로 자꾸만 눈이 내렸다 *
* 보리민대
보리알 여물기 훨씬 전부터
겨우 물알이 든 보리이삭을 잎사귀째 잘라
죽을 쑤어 먹었다 그게 청맥죽이다
오랜만에 곡기 든 죽을 먹으니
별똥 떨어지듯 눈물이 떨어진대서
별똥죽이라고도 했고, 눈물 섞어 먹는대서
젊잖게 옥루죽이라고도 했다
물알이 틉틉해진 보리이삭을 따서
가마솥에 삶아내어 말려 바순 게
파렇게 쫄깃거리는 보리민대다
아이들은 물알이 더 틉틉한 이삭을 골라
어른들 몰래 끼리끼리 구워 먹었다
불에 그슬려 구워낸 뜨거운 보리이삭을
손바닥에 비벼서 후후 불어낸
그 퍼런 보리알도 보리민대다
손바닥에 묻은 껌댕이가 꺼멓게
입 언저리에 묻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보리민대를 허겁지겁 씹어먹었다
며칠만 지나면 토실토실한 알보리밥을
고봉으로 꾹꾹 눌러 배 터지게 먹으리라
진달래꽃 따먹으며 허천나던
지긋지긋한 봄날도 이제는 끝, 아이들은
보릿고개의 마지막 먹거리
행복한 보리민대를 우적우적 씹으면서
손바닥 껌댕이를 옆엣놈 앞엣놈 낯바닥에
다투어 처바르며 낄낄거렸다 *
* 철들 무렵
은행나무 줄줄이 서서
노랗게 눈부신 길로
늙은 내외가 걸어갑니다
길바닥에 깔리는 노란 잎새 사이
드문드문 떨어진 누런 열매를
발길 멈추며 줍기도 합니다
아직 잎새가 푸른 은행나무도
드문드문 서 있습니다
떨어질 열매도 없는 아직도
푸른 잎 무성한 은행나무 밑에서
은행나무도 수컷은 철이 늦게 드나보다고
할머니가 혼잣말처럼 두런거립니다
철들면 그때부터는 볼 장 다 보는 거라고
못 들은 척하는 할아버지 대신
가을바람이 은행나무 푸른 잎새를
가만가만 흔들며 지나갑니다 *
* 새벽은
한사코 끗발이 죽는 노름판에
끗발이 끝끝내 꽉 막혀야
새벽이 온다
화톳불 식어가는 초상집에도
술독이 바닥난 주막집에도
꽁초까지 떨어져야 새벽이 온다
가물가물거리는
저 촛불이 꺼져버려야 비로소
새벽은 온다 *
* 물 끓이기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혈식(血食)을 일삼는 작고 천한 모기가
호랑이보다 구렁이보다
더 기가 막히고 열받게 한다던 다산 선생
오물수거비 받으러 오는 말단에게
신경질부리며 부끄럽던 김수영 시인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끓어오르는 놈만 미쳐 보인다
열받는 사람만 쑥스럽다
흙탕물 튀기고 간 택시 때문에
문을 쾅쾅 여닫는 아내 때문에
'솔'을 팔지 않는 담뱃가게 때문에
모기나 미친개나 호랑이 때문에 저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있다면
끓어올라 넘치더라도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은 참 얼마나 아름다우랴
배고픈 한밤중을 한참이나 잊어버리고
호랑이든 구렁이든 미친개든 말단이든
끝까지 끓어올라 당당하게
맘놓고 넘치고 싶은 물이 끓는다 *
* 지평선
하늘 땅이 맞물리는 지평선에는
가고 싶은 보고 싶은 것들도
한꺼번에 맞물려 가물거릴지
문득 그 지평선에 가고 싶었다
만경강 건너 지평선이 보인다는
심포 횟집을 찾아간다 눈이 내린다
눈이 쉽게 멎을 것 같지 않다
들마을 주막에 차를 세운다
뜨거운 바지락 국물이 목에는 시원하다
주막집 내외는 마주앉아서
담배내기 화투를 치고 있다
되창문을 열고 내다본다
보이는 건 들판 가득 눈보라뿐
하늘도 땅도 안 보이는 눈보라뿐
지평선은 보이지 않는다
여그가 바로 지평선이어라우
여그는 천지사방이 다 지평선이어라우
바람 들옹게 되창문이나 좀 닫으쇼잉
그렇구나 이 세상에는 천지사방
지평선 아닌 데가 없겠구나
보고 싶은 것들은 언제 어디서나
눈 감아도 떠도 다 가물거리겠구나
문 닫는 것도 잊어버리고
넋 놓고 눈보라를 바라본다
이 세상 천지사방에
눈이 멎을 것 같지 않다
* 백중날
호미씻이로 흥청망청한 술멕잇날, 우물 치고 풍장치고 윷 놀고 막걸리 쏟아 부은 널벅지에 불소주 섞어 훌렁훌렁 휘저으면 누가 권하지 않아도 아무나 와서 한 바가지씩 퍼마시는 백중술, 풍장치다 윷 놀다 지나가다 아무나 퍼마시다 에미애비도 쥔어른도 부처님도 몰라보는 게 백중날 머슴술이다
김매기 끝낸 호미씻이를 아무리 요란하게 해도 이 세상 풀들을 끝끝내 이겨먹을 수는 없다는 걸 머슴들은 안다 어디 풀뿐이랴, 계집도 세월도 아무리 에미애비 몰라보게 퍼마셔도 풀 말고도 이 세상에는 이겨먹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어렴풋이 알아차리며 머슴들은 한 바가지씩 어정칠월 목숨의 세월의 끈을 축인다 *
* 산토끼탕
맹년으 우리 동네 와서 살 양반잉게
미리 인사들이나 허드라고
산토끼탕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다가
나에게 사람들을 하나씩 소개하다가
소개쟁이는 갈팡질팡이다
토끼고기 먹어볼 틈도 없이
사람들이 자꾸 술만 권한다 외상으로
술추렴에 끼었다는 류씨가 산토끼를 씹으면서
왜 내 소개는 안 시키냐고 박씨에게 투덜댄다
퇴끼값도 안 낸 놈이 무슨 말이 많냐
내 명년으 소 팔아서 낼란다 이 자석아
류씨가 박씨에게 군밤 먹이는 시늉을 한다
날더러 어디서 많이 본 양반이라고
혹시 고향이 진안 근처가 아니냐고 묻는다
진안도 양반도 아니라고 해도
그럴 리가 없다고 갸웃거린다
옆방에서 화투치는 패들이 일없이
방문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느그만 쳐먹냐 여그도 좀 도라
보리주먼 외 안 주겄냐 돈만 내놔라
장짓문 사이로 오가는 수작이
피차 견딜 만한 말투다
퇴끼값도 아직 안 낸 주제에
빈 속에 주는 대로 마신 소주가
나도 아직은 견딜 만하다 *
* 입춘(立春)
얼다 녹은 냇물에
살얼음 낀다 살얼음 밟듯
목숨 걸고 봄이 오는지
궁금한 수심(水深)을 길어올리는
피라미 한 마리
하얀 뱃바닥으로 살얼음을 만져보고
갸웃거리며 다시 가라앉는다 *
* 소설(小雪)
햇살이 비쳐도 하늘에
더이상 무지개는 뜨지 않는다
찬바람이 하얀 눈 장만하느라
천둥도 번개도 무지개도 다 걷어먹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빚은 하얀 꿈들이 얼마나 강물에 빠져죽어야
하늘에 다시 무지개가 뜨는 건지
산마루에 산기슭에 희끗거리며
바람은 자꾸 강물 쪽으로만 눈보라를 밀어넣는다 *
* 진달래 캐러 왔다가
뜰에 옮기려고
진달래 캐러 산에 왔다가
진달래꽃 흐드러진 산자락
삽자루에 기대어 넋놓고
꽃구경만 한다
마음 다 비운 듯이
아무리 바라보아도
아무래도 꽃들이 심상치 않다
화장끼도 화냥끼도 없이
그냥 바람난
바람난 게 무언 줄도 모르고
그냥 바람난
아슬아슬한 여자애들만 같다
누가 진실로 마음 비우고
하염없이 바라본다면
그 곁에 다가와 비로소
맘놓고 곱게 필 진달래꽃
꽂았던 삽 뽑아들고
돌아보지도 말고 그냥 돌아갈거나
그냥 돌아가고픈 속을
환히 알고 있는지
어디 한번 일 저질러보라고
깔깔거리는 산자락마다
흐드러지는 진달래꽃 *
* 사랑니
어쩌자고 늙발에 사랑니가 난다
새로 나는 게 아니고
숨어 있던 게 드러나는갑다고
치과의사는 잠시 어이없고 나는 뭘 들킨 것처럼
욱신거리는 것도 계면쩍다
가슴에 묻어둔 눈물이 하늘에
별처럼 글썽거리는 밤도 있었거니
숨기고 감추고 묻어두어도
마침내는 이렇게 드러나는가
이거 드러나면 말썽만 피우는 거라
언젠가는 뽑아버려야 한다며
젊은 간호원은 핀셋으로 톡톡톡
남의 사랑니를 아무렇게나 두드린다 *
* 정양시집[철들 무렵]-문학동네
* 정양(鄭洋)시인
-1942년 전북 김제 사람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천정을 보며]당선, 제9회 모악문학상, 제1회 아름다운작가상 수상
-시집 [살아있는 것들의 무게][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철들무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