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황동규 시 모음

효림♡ 2009. 6. 19. 08:53

* 빗방울 화석 - 황동규   
창녕 우포늪에 가서 만났지
뻘 빛 번진 진회색 판에
점점점 찍혀있는 빗방울 화석
혹시 어느저녁 외로운 공룡이 뻘에 퍼질러 앉아
홑뿌린 눈물 자국
감춘 눈물 방울들이
채 굳지 않은 마음 만나면
흔적 남기지 않고 가기 어려우리
길섶 쑥부쟁이 얼룩진 얼굴 몇 점
사라지지 않고 맴도는 가을 저녁 안개
몰래 내쉬는 인간의 숨도
삶의 육필(肉筆)로 남으리
채 굳지 않은 마음 만나면

화석이 두근대기 시작한다
 *

 

* 쨍한 사랑 노래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서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 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그어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

 

* 꿈꽃

내 만난 꽃 중 가장 작은 꽃
냉이꽃과 벼룩이자리꽃이 이웃에 피어
서로 자기가 작다고 속삭인다
자세히 보면 얼굴들 생글생글
이빠진 꽃잎 하나 없이
하나같이 예쁘다

동료들 자리 비운 주말 오후
직장 뒷산에 앉아 잠깐 조는 참
누군가 물었다. 너는 무슨 꽃?
잠결에 대답했다. 꿈꽃
작디작아 외롭지 않을 때는 채 뵈지 않는
(내 이는 몰래 빠집니다)
바로 그대 발치에 핀 꿈꽃..
 

 

* 병꽃  

아, 저 병꽃!

봄이 무르익을 제
그 무슨 꽃보다도 더 자연스럽게
자주색으로도 피고
흰색으로도 피는,  
모여서도 살고
쓸쓸히도 사는,  
허허로운 꽃.

계획했던 일 무너지고 우울한 날
학교 뒷산을 약속 없는 인사동처럼 방황하다가
그냥 만나 서로 어깨힘 빼고
마주볼 수 있는 꽃.

만나고도 안 만난 것 같고
안 만나고도 만난 것같이
허허롭게. *

 

* 꽃의 고요

일고 지는 바람 따라 청매(靑梅) 꽃잎이
눈처럼 내리다 말다 했다
바람이 바뀌면
돌들이 드러나 생각에 잠겨 있는
흙담으로 쏠리기도 했다
'꽃지는 소리가 왜 이리 고요하지?'
꽃잎을 어깨로 맞고 있던 불타의 말에 예수가 답했다
'고요도 소리의 집합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꽃이 울며 지기를 바라시는가
왁자지껄 웃으며 지길 바라시는가?'
'노래하며 질 수도....'
'그렇지 않아도 막 노래하고 있는 참인데.'
말없이 귀 기울이던 불타가 중얼거렸다
'음, 후렴이 아닌데!' *

 

* 기항지 1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중의 어두운 용골(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개(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

 

* 기항지 2

多色의 새벽 하늘
두고 갈 것은 없다, 선창에 불빛 흘리는 낯익은 배의 구도
밧줄을 푸는 늙은 배꾼의 실루엣
출렁이며 끊기는 새벽 하늘
뱃고동이 운다
선짓국집 밖은 새벽 취기
누가 소리 죽여 웃는다
축대에 바닷물이 튀어오른다
철새의 전부를 남북으로 당기는
감각의 긴장 당겨지고
바람 받는 마스트의 검은 깃발
축대에 바닷물이 튀어오른다
누가 소리 죽여 웃는다
아직 젊군
다색의 새벽 하늘

 

시월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木琴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아늬
石燈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 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 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낡은 단청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내 며칠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와서......
뒤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

보면 낙엽 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켜지기 시작한 등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 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

* 황동규시집[삼남에 내리는 눈]-민음사

 

* 소곡(小曲) 3

내 마음 안에서나 밖에서나 
당신이 날것으로 살아 있었기 때문에
나는 끝이 있는 것이 되고 싶었습니다.


선창에 배가 와 닿듯이
당신에 가 닿고
언제나 떠날 때가 오면
넌지시 밀려나고 싶었습니다.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바라고 있지 않았던 것을.
창밖에 문득 후득이다 숨죽이는 밤비처럼
세상을 소리만으로 적시며 
남몰래 지나가고 있었을 뿐인 것을. *

 

* 귀뚜라미
베란다 벤자민 화분 부근에서 며칠 저녁 울던 귀뚜라미가
어제는 뒤꼍 다용도실에서 울었다.
다소 힘없이.
무엇이 그를 그 곳으로 이사 가게 했을까.
가을은 점차 쓸쓸히 깊어 가는데?
기어서 거실을 통과했을까,
아니면 날아서?
아무도 없는 낮 시간에 그가 열린 베란다 문턱을 넘어
천천히 걸어 거실을 건넜으리라 상상해 본다.
우선 텔레비전 앞에서 망설였을 것이다.
저녁마다 집 안에 사는 생물과 가구의 얼굴에
한참씩 이상한 빛 던지던 기계.
한번 날아올라 예민한 촉각으로
매끄러운 브라운관 표면을 만져 보려 했을 것이다.
아 눈이 어두워졌다!
손 헛짚고 떨어지듯 착륙하여
깔개 위에서 귀뚜라미잠을 한숨 잤을 것이다.
그리곤 어슬렁어슬렁 걸어 부엌으로 들어가
바닥에 흘린 찻물 마른 자리 핥아 보고
뒤돌아보며 고개 두어 번 끄덕이고
문턱을 넘어
다용도실로 들어섰을 것이다.
아파트의 가장 외진 공간으로......

......오늘은 그의 소리가 없다. *

* 황동규시집[미시령 큰 바람]-문학과지성사,2000

 

* 가을 아침

오래 살던 곳에 떨어져내려

낮은 곳에 모여 추억 속에 머리 박고 살던 이파리들이

오늘 아침 銀옷들을 입고 저처럼 정신없이 빛나는구나

말라가는 신경의 참을 수 없는 바스락거림 잠재우고

이따금 말 더듬는 핏줄도 잠재우고

시간이 증발한 눈으로 시간 속을 내다보자

방금 황국의 성대에서 굴러나오는 목소리

저 황금 고리들, 태어나며 곧 사라지는

저 삶의 입술들!

 

* 연필화(鉛筆畵)  
눈이 오려다 말고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
옅은 안개 속에 침엽수들이 침묵하고 있다
저수지 돌며 연필 흔적처럼 흐릿해지는 길
입구에서 바위들이 길을 비켜주고 있다


뵈지는 않지만 길 속에 그대 체온 남아 있다
공기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무언가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눈송이와 부딪쳐도 그대 상처 입으리 *

 

* 영포(零浦), 그 다음은?  

자꾸 졸아든다

만리포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

다음은 그대 한 발 앞서 간 영포

차츰 살림 줄이는 솔밭들을 거치니

해송 줄기들이 성겨지고

바다가 몸째 드러난다

이젠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영포 다음은 마이너스 포(浦)

서녘 하늘에 해 문득 진해지고

해송들 사이로 바다가 두근거릴 때

밀물 드는 개펄에 나가 낯선 게들과 놀며

우리 처음 만나기 전 그대를 만나리

 

* 오미자술  
오미자 한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
익기를 기다린다.
아, 차츰차츰 더 바알간 색,
예쁘다.
막소주 분자(分子)가
설악산 오미자 기개에 눌려
하나씩 분자 구조 바꾸는 광경.
매일 살짝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린다.
내가 술 분자 하나가 되어
그냥 남을까 말까 주저하다가
부서지기로 마음먹는다.  

가볍게 떫고 맑은 맛!
욕을 해야 할 친구 만나려다

전화 걸기 전에
내가 갑자기 환해진다. * 

 

*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
꽃꽂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 알

식탁에 얌전히 앉혀두고
간장병과 기름병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더 시원하게,
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

프라이팬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는 것,
겨울 비 잠시 그친 틈을 타 
바다 쪽을 향해 우윳빛 창 조금 열어놓고,
우리 모르는 새 
언덕 새파래지고
우리 모르는 새 
저 샛노란 유채꽃  
땅의 가슴 간지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 것,

이국(異國) 햇빛 속에서 겁없이 *

* 황동규시집[버클리풍의 사랑 노래]-문학과지성사

 

* 황동규(黃東奎)시인

-1938년 서울 출생

-1958년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2002년 미당문학상 수상

-시집 [어떤 개인 날][풍장][미시령 큰바람][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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