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반칠환 시 모음

효림♡ 2009. 6. 22. 08:14

* 삶 - 반칠환  

벙어리의 웅변처럼  

장님의 무지개처럼   

귀머거리의 천둥처럼 

 

* 노랑제비꽃

노랑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숲이 통째로 필요하다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

지구는 통째로 제비꽃 화분이다 *

 

* 가뭄  
저 소리 없는 불꽃 좀 보아

감열지처럼 검게 타오르는 들판
그 위로 날던 새 한 마리
한 점 마침표로 추락한다

하! 삼도내마저 말라붙어
차안과 피안의 경계가 없어졌다

 

* 호두나무 

쭈글쭈글 탱글탱글
한 손에 두 개가 다 잡히네?
수줍은 새댁이 양 볼에 불을 지핀다
호도과자는 정말 호도를 빼닮았다

 
호도나무 가로수 下 칠십년 기찻길
칙칙폭폭, 덜렁덜렁
호도과자 먹다보면 먼 길도 가까웁다

 

* 웃음의 힘

넝쿨 장미가 담을 넘고 있다

현행범이다

활짝 웃는다

아무도 잡을 생각 않고 따라 웃는다

왜 꽃의 월담은 죄가 아닌가? 

 

* 언제나 지는 내기

소나무는 바늘쌈지를 한 섬이나 지고 섰지만
해진 구름수건 한 장을 다 깁지 못하고
참나무는 도토리구슬을 한 가마 쥐고 있지만
다람쥐와 홀짝 내기에 언제나 진다
눈 어둔 솔새가 귀 없는 솔잎 바늘에
명주실 다 꿰도록
셈 흐린 참나무가 영악한 다람쥐한테
도토리 한 줌 되찾도록
결 봄 여름 없이 달이 뜬다 *

* 장미와 찔레 경복궁 맞은편 육군 병원엔 울타리로 넝쿨장미를 심어놓았습니다. 조경사의 실수일까요. 장난일까요. 붉고 탐스런 넝쿨장미가 만발한 오월, 그 틈에 수줍게 내민 작고 흰 입술들을 보고서야 그 중 한 포기가 찔레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얼크러설크러졌으면 슬쩍 붉은 듯 흰 듯 잡종 장미를 내밀 법도 하건만 틀림없이 제가 피워야 할 빛깔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꽃잎은 진 지 오래되었지만, 찔레넝쿨 가시가 아프게 살을 파고듭니다. 여럿 중에 너 홀로 빛깔이 달라도 너는 네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보도 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 봄  저 요리사의 솜씨 좀 보게
누가 저걸 냉동 재룐 줄 알겠나
푸릇푸릇한 저 싹도
울긋불긋한 저 꽃도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라네
아른아른 김조차 나지 않는가

* 목격  -속도에 대한 명상  

질주하는 바퀴가
청개구리를 터뜨리고 달려갔다


나는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데
아무런 제동도 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 바퀴 -속도에 대한 명상 5  

우리는 너 나 없이 세상을 굴러먹고 다닌다
아버님, 오늘은 어디서 굴러먹다 오셨나요
아들아, 너는 어디서 굴러먹다 이리 늦었느냐
여보, 요즘은 굴러먹기도 예전 같지 않아요
이거,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야

 

바퀴를 타자 우리 모두 후레자식이 되어 버렸다

 

* 먹은 죄 

새끼들에게 줄 풀벌레 잡아오던

지빠귀를 새매가 나꾸어 갔다

가까스로 허물 벗은 날개 말리던

잠자리를 물총새가 꿀꺽 삼켜 버렸다

오전에 돋은 새싹을 다람쥐가 갉아먹는다

그러나 어느 유족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다 먹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한없이 슬퍼도 적막한, 푸른 숲 속의 일이다

 

* 갈치조림을 먹으며

얼마나 아팠을까? 

이 뾰족한 가시가 모두 살 속에 박혀 있었다니

* 멸치에 대한 예의
큰 생선은 머리 떼고, 비늘 떼고, 내장 발라내고, 지느러미 떼면서 멸치를 통째로 먹는 건 모독이다 어찌 체구가 작다고 염을 생략하랴 멸치에 대한 예의를 갖추자 

* 낮달
울 어매 얇게 빗썰어 놓은 

무 한 장

* 목숨
그럴 분이 아닌데

 

 손가락도 열 개

 발가락도 열 개

 이빨은 젖니 한 벌

 영구치 한 벌 

 

 참 꼼꼼하신 분인데 

 

 가장 소중한 목숨이 

 하나뿐이라니

 

* 냇물이 얼지 않는 이유
겨울 양재천에 왜가리 한 마리
긴 외다리 담그고 서 있다

냇물이 다 얼면 왜가리 다리도
겨우내 갈대처럼 붙잡힐 것이다

어서 떠나라고 냇물이
말미를 주는 것이다

왜가리는 냇물이 다 얼지 말라고
밤새 외다리 담그고 서 있는 것이다

 

* 웅켜쥔 주먹을 펴라  
보리 한 줌 움켜쥔 이는 쌀가마를 들 수 없고

곳간을 지은 이는 곳간보다 큰 물건을 담을 수 없다 

성자가 빈 손을 들고, 새들이 곳간을 짓지 않는 건 

천하를 다 가지려 함이다 

설령 천하에 도둑이 든들

천하를 훔쳐다 숨길 곳간이 따로 있겠는가?

평생 움켜쥔 주먹 펴는 걸 보니 

저이는 이제 늙어서 새로 젊어질 때가 되었구나 

 

*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봄이 꽃나무를 열어젖힌 게 아니라

두근거리는 가슴이 봄을 열어젖혔구나


봄바람 불고 또 불어도

삭정이 가슴에서 꽃을 꺼낼 수 없는 건

두근거림이 없기 때문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 감꽃  

장독대 위에 감꽃이 지네

투욱ㅡ

이승에서 저승으로

장맛이 익는 사이

 

* 어떤 기구(祈求)

제단에 돼지머리를 바치며 빈다

아무도 아무를 해치지 않는 세상 되게 하옵소서

* 공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사람이 노래하자

제초제가 씨익 웃는다

 

* 이기주의  

'나는 너, 너는 나 우리는 한몸이란다'

설법을 듣고 난 동승이 말했다

'알았어요. 하지만 내가 스님일 때보다

스님이 나일 때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 팔자

나비는 날개가 젤루 무겁고

공룡은 다리가 젤루 무겁고

시인은 펜이 젤루 무겁고

건달은 빈 등이 젤루 무겁다

 

경이롭잖은가

저마다 가장 무거운 걸

젤루 잘 휘두르니

 

* 시치미 

저 해 맑은 거짓말 좀 보게나

 

치악산 능선마다

새똥, 곰똥, 달팽이 오줌

다 씻어 내린 계곡물이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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