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새 내린 비 - 이정하
간밤에 비가 내렸나 봅니다
내 온몸이 폭삭 젖은 걸 보니
그대여, 멀리서 으르렁대는 구름이 되지 말고
가까이서 나를 적시는 비가 되십시오
* 아껴가며 사랑하기
나는 이제 조금만 사랑하고
조금씩만 그리워하기로 했습니다
한꺼번에 사랑하다 그 사랑이 다해버리기보다
한꺼번에 그리워하다 그 그리움이 다해버리기보다
조금씩만 사랑하고 조금씩만 그리워해
오래도록 그대를 내 안에 두고 싶습니다
아껴가며 읽는 책, 아껴가며 듣는 음악처럼
조금씩만 그대를 끄집어내기로 하였습니다
내 유일한 희망이자 기쁨인 그대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이 없어지고 지워지지만
그대 이름만은 내 가슴속에
오래오래 남아 있길 간절히 원하기에 *
* 떠나는 이유
떠나는 사람에겐 떠나는 이유가 있다
왜 떠나는가 묻지 말라
그대와 나 사이에 간격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 말라
괴로움의 몫이다
* 단풍잎 사랑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안에 난 내 모든 것을 풀어 놓았습니다
가을날 단풍잎에게 가서 물어 보십시요
낙엽이 되어 떨어질 걸 뻔히 알면서도
왜 그 순간까지 자기 몸을 남김없이 태우는지
* 사랑할수 없음은
사랑할 수 없음은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받지 못함은
견딜 만한 아픔입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없음은
너무 아파 느낄 수도 없는 고통입니다
* 창문과 달빛
그대는
높은 담장 안
창문입니다
거대한 벽 앞에
발 부르트던
나는
부르지 않아도
그대 곁에 다가가는
달빛입니다
* 기원
이 한세상 살아 가면서
슬픔은 모두 내가 가질테니
당신은 기쁨만 가지십시오
고통과 힘겨움은 내가 가질테니
당신은 즐거움만 가지십시오
줄 것만 있으면 나는 행복하겠습니다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 슬픔 안의 기쁨
떠났으므로 당신이
내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보내야 했으므로 슬픔이 오기 전
기쁨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네
훗날, 나는 다시 깨닫기를 바라네
이 세상에 태어나 한 사람을 사랑했고
그 한 사람 때문에 못내 가슴 아팠을지라도
내가 간직한 그 사랑으로 인해
내 삶은 아름다웠고
또 충분히 행복했노라고..... *
* 이정하시집[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푸른숲
* 너의 모습
산이 가까워질수록
산을 모르겠다
네가 가까워질수록
너를 모르겠다
멀리 있어야 산의 모습이 또렷하고
떠나고 나서야 네 모습이 또렷하니
어쩌란 말이냐,이미 지나쳐 온 길인데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인데
벗은 줄 알았더니
지금까지 끌고 온 줄이야
산그늘이 깊듯
네가 남긴 그늘도 깊네
* 바람 속을 걷는 법 2
바람 불지 않으면 세상살이가 아니다
그래, 산다는것은
바람이 잠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바람이 약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바람 속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두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것
바람이 드셀수록 왜 연은 높이 나는지
* 별
너에게 가지 못하고
나는 서성인다
내 목소리 닿을 수 없는
먼 곳의 이름이여
차마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고
다만 보고 싶어진다고만 말하는 그대여
그대는 정녕 한 발짝도
내게 내려오지 않긴가요
* 인사 없이
그대 진정 나를 사랑했거든
떠난다는 말 없이 떠나라
잠깐 볼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거니
그래도 오지 않으면
조금 늦는가보다, 생각하고 있을 테니
그대 진정 나를 사랑했거든
떠난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떠나라
* 드러낼 수 없는 사랑
비록 그 사랑이 아픈 사랑일지라도
남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말도 할 수 없는 사랑, 그래서 혼자의 가슴속에만
묻어 두어야 하는 사랑을 가진 사람에 비해서
밝힐 수 없는 사랑
결코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사랑
그러나 그 사람에겐
오래 간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의 가슴이 잿더미가 되는 줄 모르고
* 이정하시집[한 사람을 사랑했네]-자음과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