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이정하 시 모음 2

효림♡ 2009. 6. 25. 08:14

* 밤새 내린 비 - 이정하  
간밤에 비가 내렸나 봅니다
내 온몸이 폭삭 젖은 걸 보니

그대여, 멀리서 으르렁대는 구름이 되지 말고
가까이서 나를 적시는 비가 되십시오

 

* 아껴가며 사랑하기  

나는 이제 조금만 사랑하고 
조금씩만 그리워하기로 했습니다 
한꺼번에 사랑하다 그 사랑이 다해버리기보다 
한꺼번에 그리워하다 그 그리움이 다해버리기보다 
조금씩만 사랑하고 조금씩만 그리워해  
오래도록 그대를 내 안에 두고 싶습니다  
아껴가며 읽는 책, 아껴가며 듣는 음악처럼  
조금씩만 그대를 끄집어내기로 하였습니다 
내 유일한 희망이자 기쁨인 그대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이 없어지고 지워지지만  
그대 이름만은 내 가슴속에  
오래오래 남아 있길 간절히 원하기에 *

 

* 떠나는 이유
떠나는 사람에겐 떠나는 이유가 있다
왜 떠나는가 묻지 말라

그대와 나 사이에 간격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 말라

괴로움의 몫이다 

 

* 단풍잎 사랑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안에 난 내 모든 것을 풀어 놓았습니다
가을날 단풍잎에게 가서 물어 보십시요
낙엽이 되어 떨어질 걸 뻔히 알면서도
왜 그 순간까지 자기 몸을 남김없이 태우는지

 

* 사랑할수 없음은
사랑할 수 없음은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받지 못함은
견딜 만한 아픔입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없음은
너무 아파 느낄 수도 없는 고통입니다

 

* 창문과 달빛
그대는
높은 담장 안
창문입니다
거대한 벽 앞에
발 부르트던
나는
부르지 않아도
그대 곁에 다가가는
달빛입니다

 

* 기원
이 한세상 살아 가면서
슬픔은 모두 내가 가질테니
당신은 기쁨만 가지십시오
고통과 힘겨움은 내가 가질테니
당신은 즐거움만 가지십시오

줄 것만 있으면 나는 행복하겠습니다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 슬픔 안의 기쁨

떠났으므로 당신이
내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보내야 했으므로 슬픔이 오기 전
기쁨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네

훗날, 나는 다시 깨닫기를 바라네
이 세상에 태어나 한 사람을 사랑했고
그 한 사람 때문에 못내 가슴 아팠을지라도
내가 간직한 그 사랑으로 인해
내 삶은 아름다웠고
또 충분히 행복했노라고..... *

* 이정하시집[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푸른숲

 

* 너의 모습 
산이 가까워질수록
산을 모르겠다
네가 가까워질수록
너를 모르겠다

멀리 있어야 산의 모습이 또렷하고
떠나고 나서야 네 모습이 또렷하니
어쩌란 말이냐,이미 지나쳐 온 길인데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인데

벗은 줄 알았더니
지금까지 끌고 온 줄이야
산그늘이 깊듯
네가 남긴 그늘도 깊네 

 

* 바람 속을 걷는 법 2
바람 불지 않으면 세상살이가 아니다
그래, 산다는것은
바람이 잠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바람이 약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바람 속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두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것
바람이 드셀수록 왜 연은 높이 나는지 

 

* 별
너에게 가지 못하고
나는 서성인다

내 목소리 닿을 수 없는
먼 곳의 이름이여
차마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고
다만 보고 싶어진다고만 말하는 그대여
그대는 정녕 한 발짝도
내게 내려오지 않긴가요 

 

* 인사 없이
그대 진정 나를 사랑했거든
떠난다는 말 없이 떠나라

잠깐 볼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거니
그래도 오지 않으면
조금 늦는가보다, 생각하고 있을 테니

그대 진정 나를 사랑했거든
떠난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떠나라
 

 

* 드러낼 수 없는 사랑

비록 그 사랑이 아픈 사랑일지라도

남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말도 할 수 없는 사랑, 그래서 혼자의 가슴속에만

묻어 두어야 하는 사랑을 가진 사람에 비해서

 

밝힐 수 없는 사랑

결코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사랑

그러나 그 사람에겐

오래 간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의 가슴이 잿더미가 되는 줄 모르고

* 이정하시집[한 사람을 사랑했네]-자음과모음 

 
* 봉함 엽서
잘 지내리라 믿습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이 곳에 없는 건 당신뿐입니다. 모든 것이 다
제자리에 있는데 다만 당신만이 내 곁에 없습니다
비 내리는 오늘 같은 날이면 창가에 앉아
칼국수나 먹었으면 좋겠다, 라고 한 그대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슬며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나요, 당신만 생각하면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고이는 내 헤픈 마음을
 
오후 늦게부터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만
궂은 우리 사랑엔 언제나 먹구름이 걷혀질까요
길을 걷다 무심히 쳐다본 하늘엔
노을이 걸려 있었습니다. 나는 까닭 모르게
한숨이 났습니다. 보고싶다, 라는 말도
저처럼 핏빛 붉은 빛이겠지요
탈래도 더 탈 것 없는 가슴,
쓸래도 더 쓸 수 없는 내 마음의 여백은
당신이 알아서 헤아려주십시요
안녕이란 말조차 나는 가슴저려 못하겠습니다 *
* 이정하시집[그대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푸른숲

'시인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광섭 시 모음  (0) 2009.06.30
이해인 꽃시 모음  (0) 2009.06.26
김용택 시 모음 3  (0) 2009.06.24
반칠환 시 모음  (0) 2009.06.22
황동규 시 모음  (0) 2009.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