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김영랑 시 모음

효림♡ 2009. 6. 16. 08:46

  * 사개틀닌 고풍의 툇마루에 - 김영랑  

   사개틀닌 고풍(古風)의 툇마루에 없는 듯이 앉아

   아직 떠오를 기척도 없는 달을 기둘린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뜻 없이


   이제 저 감나무 그림자가

   사뿐 한 치씩 옮아오고

   이 마루 위에 빛깔의 방석이

   보시시 깔리우면


   나는 내 하나인 외론 벗

   가냘픈 내 그림자와

   말없이 몸짓없이 서로 맞대고 있으려니

   이 밤 옮기는 발짓이나 들려오리라  *

*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

*발표제목-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 영랑시선-돌담에 소색이는 햇발

 

*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나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디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나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

 

마당 앞 맑은 새암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밑에
사로잡힌 넋 있어
언제나 먼 하늘만
내어다보고 계심 같아

별이 총총한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속에
편히 누운 넋 있어
이 밤 그 눈 반짝이고
그의 겉몸 부르심 같아

마당 앞
맑은 새암은 내 영혼의 얼굴 *

* 오월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졌다

바람은 넘실 천(千)이랑 만(萬)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여태 혼자 날아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 빛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밤 너 어디로 가버리련? *

 

* 독(毒)을 차고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디!"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디!"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마금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   

* 김영랑시집[모란이 피기까기는]-동아일보사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 물소리

바람따라 가지오고 멀어지는 물소리
아주 바람같이 쉬는 적도 있었으면
흐름도 가득 찰랑 흐르다가
더러는 그림같이 머물렀다 흘러보지
밤도 산골 쓸쓸하이 이 한밤 쉬어가지
어느 뉘 꿈에 든 셈 소리 없든 못할소냐

 

새벽 잠결에 언뜻 들리어
내 무건 머리 선뜻 씻기우니
황금소반에 구슬이 굴렀다.  
오 그립고 향미론 소리야
물아 거기 좀 멈췄으라 나는 그윽히
저 창공의 銀河萬年을 헤아려보노니

  

* 북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엇모리 자진모리 휘몰아 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맞아서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어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면 만갑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콘덕터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요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 가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치지 *
 

 

 

* 거문고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 번 바뀌었는데
내 기린(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老人)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둘 곳 몸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 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놓고 울들 못한다

 

 

* 쓸쓸한 뫼 앞에 

쓸쓸한 뫼 앞에 후젓이 앉으면

마음은 갈앉은 양금줄같이

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부비면

넋이는 향맑은 구슬 손같이

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

무덤이 그리워 산골로 가노라 *

 

* 향내 없다고

향내 없다고 버리실라면

내 목숨 꺾지나 말으시오

외로운 들꽃은 들가에 시들어

철없는 그이의 발끝에 좋을걸 *

*김영랑(金永郞) 시인

-1903~1950 전남 강진 사람 
-1930년 [동백잎 빛나는 마음] 을 발표, 등단
-1949년 [영랑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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