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첫사랑 - 류시화

효림♡ 2009. 6. 17. 08:17

* 첫랑 - 류시화 
이마에 난 흉터를 묻자 넌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친 상처라고 했다

어떤 날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그 별로 올라가곤 했다
내가 시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한다고
넌 불평을 했다
희망 없는 날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난 다만 말하고 싶었다

어떤 날은 그리움이 너무 커서
신문처럼 접을 수도 없었다

누가 그걸 옛 수첩에다 적어 놓은 걸까
그 지붕 위의
별들처럼
어떤 것이 그리울수록 그리운 만큼
거리를 갖고 그냥 바라봐야 한다는 걸 *

 

* 물안개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안개처럼
몇겁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

 

* 소금인형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

 

* 눈 위에 쓴 시  

누구는 종이 위에 시를 쓰고

누구는 사람 가슴에 시를 쓰고

누구는 자취 없는 허공에 대고 시를 쓴다지만

 

나는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 

눈이 녹아 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

 

* 그토록 많은 비가 

1. 그토록 많은 비가 내렸구나
밤 사이 강물은 내 키만큼이나 불어나고
전에 없던 진흙무덤들이 산 아래 생겨났구나
풀과 나무들은 더 푸르러졌구나
집 잃은 자는
새 집을 지어야 하리라
그토록 많은 비가 내려
푸르른 힘을 몰고 어디론가 흘러갔구나
몸이 아파 누워 있는 내 머리맡에선
어느 새 이 꽃이 지고 저 꽃이
피어났구나

2. 그토록 많은 비가 내리는 동안
나는 떡갈나무 아래 선 채로 몸이 뜨거웠었다
무엇이 이곳을 지나 더 멀리 흘러갔는가
한번은 내 삶의 저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모든 것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한 번은 이보다 더 큰 떡갈나무가
밤에 비를 맞으며 내 안으로 걸어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내 생각은 얼마나 더 깊어지고
떡갈나무는 얼마나 더 풍성해졌는가

3. 길을 잃을 때면
달팽이의 뿔이 길을 가르쳐 주었다
때로는 빗방울이
때로는 나무 위의 낯선 새가
모두가 스승이었다
달팽이의 뿔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나는 먼 나라 인도에도 다녀오고
그곳에선 거지와 도둑과 수도승들이
또 내게 길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병들어 갠지스 강가에 쓰러졌을 때
뱀 부리는 마술사가 내게 독을 먹여
삶이 한 폭의 환상임을 보여 주었다
그 이후 영원히 나는 입맛을 잃었다

4. 그때 어떤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펼치고
비 속을 날아갔었다
밤이었다
내가 불을 끄고 눕자
새의 날개가 내 집 지붕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도 오랫동안
비가 내렸다
나는 병이 더 깊어졌다 *
 

 

* 비 그치고 - 류시화
비 그치고
나는 당신 앞에 선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내 전생애를 푸르게, 푸르게
흔들고 싶다
푸르름이 아주 깊어졌을 때쯤이면
이 세상 모든 새들을 불러 함께
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

 

* 길 위에서의 생각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

 

* 잊었는가 우리가  

잊었는가 우리가 손잡고

나무들 사이를 걸어간 그 저녁의 일을

우리 등 뒤에서 한숨지며 스러지던

그 황혼의 일을

나무에서 나무에게로 우리 사랑의 말 전하던

그 저녁새들의 일을

 

잊었는가 우리가 숨죽이고

앉아서 은자처럼 바라보던 그 강의 일을

그 강에 저물던 세상의 불빛들을

잊지 않았겠지 밤에 우리를 내려다보던

큰곰별자리의 일을, 그 약속들을

별에서 별에게로 은밀한 말 전하던

그 별똥별의 일을

 

곧 추운 날들이 시작되리라

사랑은 끝나고 사랑의 말이 유행하리라

곧 추운 날들이 와서

별들이 떨어지리라

별들이 떨어져 심장에 박히리라 *

 

* 구월의 이틀
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숲에서 보냈다 비와
높고 낮은 나무들 아래로 새와
저녁이 함께 내리고 나는 숲을 걸어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사귀들은
비에 부풀고 어느 곳으로 구름은
구름과 어울려 흘러갔으며

그리고 또 비가 내렸다
숲을 걸어가면 며칠째 양치류는 자라고
둥근 눈을 한 저 새들은 무엇인가
이 길 끝에 또다른 길이 있어 한 곳으로 모이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래의 강물들

멀리까지 손을 뻗어 나는
언덕 하나를 붙잡는다 언덕은
손 안에서 부서져
구름이 된다

구름 위에 비를 만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있어 그 잎사귀를 흔들어
비를 내리고 높은 탑 위로 올라가 나는 멀리
돌들을 나르는 강물을 본다 그리고 그 너머 더 먼 곳에도
강이 있어 더욱 많은 돌들을 나르고 그 돌들이
밀려가 내 눈이 가닿지 않는 그 어디에서
한 도시를 이루고 한 나라를 이룬다 해도

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나의 구월이 있다
구월의 그 이틀이 지난 다음
그 나라에서 날아온 이상한 새들이 내
가슴에 둥지를 튼다고 해도 그 구월의 이틀 다음
새로운 태양이 빛나고 빙하시대와
짐승들이 춤추며 밀려온다고 해도 나는
소나무숲이 감춘 그 오솔길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을 본다 *


* 류시화시집[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푸른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