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섬진강 26 -밤꽃 피는 유월에 - 김용택

효림♡ 2009. 6. 23. 08:29

* 섬진강 26 -밤꽃 피는 유월에 - 김용택

 

어이, 이 사람

자네 죽어 밤꽃 피는 유월의 산

거기 둥그렇게 잠들더니

내 죽어 밤꽃 피는 유월의 산

여기 묻혀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 서로 바라보겠네.

여기 나서 자라 농사 지으며 늙어

죽을 때까지

자네 그 산 거기 나무하고 풀하고

곡식 뿌려 거두며

어이! 담배 한대 태우고 일허세,

어이! 쉬었다 허세,

서로 부르면

감나무 아래 밭가 바위에 앉아

땀 식히고 담배 태우며

숨 몰아쉬고

서로 바라보다 다시 일허고

해 저문 징검다리에서 만나면

헌 삼베 등지기 땀에 젖어 쉰내 나고

지게 위에 수북하던 풀과 나무

자네 나뭇짐 하나는 참으로

감자 먹고 똥 싼 것처럼 고왔고

내 바작풀 하나는 고봉밥처럼 잘도 쌓았지

우리 징검다리 하나씩 차지허고

웃통 벗어 몸 씻을 때

서로 보던 자네 몸과 내 몸에

푸르게 멍든 지게 자국

죽으면 등태 자국이 먼저 썩는다며

서로 다정히 밀어주던

등과 어깨에 깊이 박힌 짚 자국들.

그 선명허던 옆구리 총알 자국

그 흉터만 보면

자네 그 산에 숨고

나 이 산에 숨었다가

자네 아니면 내 어찌 살았고

나 아니었으면 자네가 어떻게 살았겠냐며

내 옆구리 대창 자국 쓰다듬으며

우린 서로 몸서리치곤 했었지

이제 그 자국들 먼저 썩겠네.

 

자네가 먼저 일어나면

자네가 날 불러 깨우고

내가 먼저 일어나면

내가 자네 불러 깨우고

그렇게 우리 벗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안개 낀 새벽 깔 베러 다니던 강변

지금 거기 소들이 개값 되어 매여 있네

어이 이 사람

그때가 참 좋았으이

여기저기 논밭두럭 산골짜기에

새벽일 나온 사람들의 걸찍한 웃음소리들,

담배가 떨어져도

성냥이 이슬에 젖어도

아쉴 게 없었지

안개에 젖어 그 싱싱허던

징검다리에서 다 만나

몸 씻던 일들

짙은 안개와 바작 위에 풀꽃들

어이, 죽어 보니 인제 그게

참 이쁜 꽃들이었네그랴.

 

우리 함께 성주하며

상량 올려 떡 먹고 술 먹으며

벽 붙이고 지붕에 얼싸덜싸 흙 얹어

달밤에 모여 나래 엮어

함께 집 이어

집들이 굿 칠 때

우린 모다들 을매나 좋았던가.

그 흙냄새 나던 방은 이제 뜯겨

이 빠진 자국처럼 휑하고

장독거리엔 접시꽃들이 우북허게 하얀허이

우리 함께 모여 지새우던 사랑방 자리와 마당에

지금 강냉이가 저리 원부렁허네

잡풀 우북헌 것이 하도 보기 싫어

내가 그 딴딴한 자네 마당을 파 엎었다네

기가 막히데 이 사람아

참 서러웠으이

봄날,

어쩌다 자네 빈 집터를 지나다 보면

꺼먼 부엌자리나 마당에

작은 풀잎들이 돋아나는 것을 볼라치면

나는 눈물이, 눈물이 났었지

그 작은 잡초들을 보며 앉아 있노라면

자네와 내가

한 식구처럼 지내던

지나간 일들이 머리를 스쳐

나는 허망허게

앞산을 바라보곤 혔었지.

앞산 뒷산 산 곳곳

논과 밭들이 꽉 짜이고

훈짐 나던 동네가 나간 동네마냥

이제 썰렁허기만 허네

농사 질 땐 미친 사람들처럼

흙범벅 땀범벅 피범벅 되어

이 논 저 논

윗논 아랫논 모내고 논 매며

세월 가는지 모르게 살며

논두렁에 앉아 못밥 두렛밥

배 터지게 먹고

논두렁에 자빠져 잘 때

내가 봐도 사람 몰골이 아닌 것 같았었지

그저 웬수야 악수야

박 터지고 코피 터지게 물쌈하고 나서도

명절 돌아와

자네 장구 치고 나 징 치며

개덩개 굿 치고 나면

우리들은 늘 그만이었었지

자네 그 좋은 발짓 고운 손짓으로

장구 치던 덩글덩글 장구소리

지금도 강에 산에 울리는 듯허이.

 

다 늙어빠진 동무들은 나를 밟아 묻으면서

우리 살았을 때마냥

소새끼, 돼지새끼 낳은 이야기며

농사 걱정 병충해 걱정

서울 간 아들딸 걱정 빚 걱정들을 허며

내 무덤을 따독거려 만들어가네

그러다가 술이 벌겋게 취허면

내가 땅속에 들었음을 생각허고

어이, 이 사람 편헌 데 가서 편히 쉬소,

사람이 살았달 것이 없다며

붉은 황토를 벌겋게 파뒤집어

둥그렇게 둥그렇게 봉분을 만들고

벌안을 만들어가네

술이 취해

그 가죽만 남은 주름투성이

그 꺼칠헌 수염투성이 땅빛 얼굴로

밤꿀내 나는 저 칙칙헌 유월의 이 산 저 산

우리 정든 산 바라보며

메마른 눈물 삐적거리네

어디 우리가 흘릴 눈물이나 남았는가

산다는 것이 참 금방이여

우리 여기 나서 죽을 때까지

온갖 세상 풍파에 다 시달리며

허리 펼 날 없더니

참 죽응게 허리 펴지네그려

우리 살았던 세상 세월

칠십여 평생

참 기구혔었지

우리가 언제 우리덜말고

사람들에게 사람대접 받은 적 있었는가.

 

무덤을 만들어 벌안을 널찍이 다듬어놓고

사람들이 풀길을 헤치며

길 없이 오더니 길 따라 가네

야, 이 사람아

저 산 좀 보게나

자네와 내가 온 삭신이 부서지게 일구어 짓던

논밭들이 저렇게 높은 데서부터 묵어가고

묵정밭엔 풍년초꽃이 하얀허네.

저게 꽃이라고 생각허면

나는 목이 메었었지

지게목발 두드리며

거름 지고 풀짐 지고

굽이굽이 줄줄이 오르내리던 산길 강길

풀들이 우북허게 길을 메워

인젠 길이 없네

징검다리 건너

몇 갈래로 갈라지던 길들

한 갈래로 모아지던

징검다리들은 물때가 끼어가고

이제 사람들이 드문드문허이

자네랑 나랑 우리 모두

지게 받쳐놓고 쉬던

저 장산 중턱

육이오 난리통에 우리랑 끌려가 죽은 벗의 무덤 가에

나뭇짐 받쳐놓고

담배 태워가며

어린 자식들 쌈 붙이고 씨름시키던

그 즐겁던 웃음소리들이

와르르와르르   산골짜기에 울리는 듯허이

인제 그놈들도 다 객지 풍산허고

공일날 아니면 상여 떠멜 사람도 없이

산들이 칙칙해 발길 들여놓을 데 없다네

 

어이 이 사람

우리 피난 다니다

굴 파고 살던 저 평밭머리

땡감도 떨어지고

물렁감도 떨어진다지만

땡감이 많이 떨어진 이 오뉴월에

자네는 거기 그렇게

언제 불러도

일하다 허리 펴고

정답게 맞부르던 나는 여기

따독따독 묻혔네

아침저녁 밤

제 바라보고 들어가도

포근하기만 했던 산

기쁜 일 슬픈 일

다 품어주던 산이

죽음까지 묻히니 더 그러허이

어이, 이 사람아

살아 우리가 산 봤더니

죽어 우리가 동네 보겠네

다 보이네

굽이굽이 하얀 강물

그 강물 속 바위

어느 바위 속에 무슨 고기가 들어 있는지도

우린 철철이 훤했었지

이쪽 저쪽 등쌀에 못 견뎌

밤이면 도망가 숨죽여 자던

저 여울목 넓적헌 바위며

소 매던 너른 강변의 돌멩이들

점심 먹고 나와 쉬던

저 듬직헌 느티나무

저녁밥 먹고 나와 잠자던 벼락바위

보릿짐, 달 뜨면 밤나락 지고 걷던 논밭두렁

앞산 뒷산 나무 풀 한 포기

칡넝쿨 한 무더긴들

우리 손발 안 간 데 있능가

자네가 죽어 자네 자리 비어

동네 곳곳이 쓸쓸터니

내가 죽어 또 한 자리 비겄네

나를 묻은 사람들이

드문드문 허전허게

우리집에 드는 것이

훤히 보이네

저들 또한 살다가 와서

내 곁에 아니면 자네 곁에 묻히겄지

사람 사는 일이 참 허망허네.

 

어이 이 사람아

우리 땅속에 들어서야

이제 일 없네그려

허지만 이 사람아

무겁네 무겁네 혀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농사꾼은 그저 흙짐이

제일 무거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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