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자화상 - 김용택

효림♡ 2009. 6. 24. 08:58

* 자화상 - 김용택

 

사람들이 앞만 보며 부지런히 나를 앞질러갔습니다

나는 산도 보고, 물도 보고, 눈도 보고, 빗줄기가 강물을 딛고 건너는 것도 보고    

꽃 피고 지는 것도 보며 깐닥깐닥 걷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이 다 떠나갔지요

난 남았습니다

남아서, 새, 어머니, 농부, 별, 늦게 지는 달, 눈, 비, 늦게 가는 철새

일찍 부는 바람

잎 진 살구나무랑 살기로 했습니다

그냥 살기로 했답니다

가을 다 가고 늦게 우는 철 잃은 풀벌레처럼

쓸쓸하게 남아

때로, 울기도 했습니다

 

아직 겨울을 따라가지 않은

가을 햇살이 샛노란 콩잎에 떨어져 있습니다

유혹 없는 가을 콩밭 속은 아름답지요

 

천천히 가기로 합니다

천천히, 가장 늦게 물들어 한 대엿새쯤 지나 지기로 합니다

 

그 햇살 안으로 뜻밖의 낮달이 들어오고 있으니 *

 

* 김용택시집[수양버들]-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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