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 안도현

효림♡ 2009. 7. 1. 09:07

*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 안도현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올 때가 있네

 

도꼬마리의 까실까실한 씨앗이라든가
내 겨드랑이에 슬쩍 닿는 민석이의 손가락이라든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와서 나를 갈아엎는
치통이라든가
귀틀집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라든가
수업 끝난 오후의 자장면 냄새 같은 거

 

내 몸에 들어와서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마구 양푼 같은 내 가슴을 긁어댈 때가 있네

 

사내도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네
고대광실 구름 같은 집이 아니라
구름 위에 실컷 웅크리고 있다가
때가 오면 천하를 때릴 천둥 번개 소리가 아니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오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서러워져
소주 한잔 마시러 가네

 

소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이 저의 감옥인 줄도 모르고
내 몸에 들어와서
나를 뜨겁게 껴안을 때가 있네
 *

 

* 옆모습 
나무는 나무하고 서로 마주보지 않으며
등 돌리고 밤새 우는 법도 없다
나무는 사랑하면 그냥,
옆모습만 보여준다

옆모습이란 말 얼마나 좋아
옆모습, 옆모습, 자꾸 말하다보면
옆구리가 시큰거리잖아

앞모습과 뒷모습이
그렇게 반반씩 들어앉아 있는 거

당신하고 나하고는
옆모습을 단 하루라도
오랫동안 바라보자
사나흘이라도 바라보자 *

* 안도현시집[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비

 

* 숭어   

숭어가 연락도 하지 않고

뛰어오른다 불쑥불쑥, 숭어는 왜 뛰어오르는가

이 일없는 저녁바다의 수면 위로

 

뛰어 오르며 숭어는

바다가 차갑게 펼쳐놓은 적막의 치맛자락을 찢어보자는 것인가

저렇게 숭엄한 하늘의 구름장과 노을에다

수직의 칼금이라도 내보겠다는 것인가

 

보이지않는 바다의 뱃속은

이 세상처럼 짜고, 끓는 찌개냄비처럼 뜨거울 수도 있겠다

 

평평하고 멀리까지 뻗어 눈에 가물가물해야 길인가

숭어가 뛰어오르는 저

찰나의 한순간도 찬란하고 서늘한 길이 아닌가 *

 

* 그 밥집

뜨끈뜨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중앙시장 그 밥집

어물전 아줌마도 수선집 아저씨도 먹고 가는 그 밥집

누구 하나 밥 한 톨 안 남기고 반찬 투정 한번 부리지 않는 그 밥집

그 밥집 밥 먹고 난 뒤에는 노는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을 그 밥집 *

 

* 길 따라

산서 장날 어물전 조기들이

상자 속에 반듯하게 누워 있다

부안산, 이라 붙어 있다

부안이면 여기서 300리도 넘는 곳

나는 조기를 싣고 왔을 트럭을 생각하고

조기가 흘러왔을 길을 짚어본다

 

부안 죽산 동진 김제 용지 이서 전주 관촌 임실 오수 지사 산서 *

 

* 장날

장꾼들이

점심때 좌판 옆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니

그 주변이 둥그랗고

따뜻합니다 *

 

* 벽시 5  

우리나라 모닥불 근처에는

사람이 있다

 

살아서

모여 있다

등짝은 외롭고 캄캄해도

그 가슴이 화끈거리는 *

 

* 빗소리

저녁 먹기 직전인데 마당이 왁자지껄하다//

문 열어보니 빗줄기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와서 진을 치고 있다//

둥근 투구를 쓴 군사들의 발소리가 마치 빗소리 같다//

부엌에서 밥 끓는 냄새가 툇마루로 기어 올라온다//

왜 빗소리는 와서 저녁을 이리도 걸게 한상 차렸는가//

나는 빗소리가 섭섭하지 않게 마당 쪽으로 오래 귀를 열어둔다//

그리고 낮에 본 무릎 꺾인 어린 방아깨비의 안부를 궁금해한다 *

* [시가 내게로 왔다 3]-마음산책

 

* 고래를 기다리며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

* [사랑합니다 안녕]-고려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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