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나무 - 도종환

효림♡ 2009. 7. 3. 08:07

* 나무 - 도종환  

퍼붓는 빗발을 끝까지 다 맞고 난 나무들은 아름답다

밤새 제 눈물로 제 몸을 씻고

해 뜨는 쪽으로 조용히 고개를 드는 사람처럼

슬픔 속에 고요하다

바람과 눈보라를 안고 서 있는 나무들은 아름답다

고통으로 제 살에 다가오는 것들을

아름답게 바꿀 줄 아는 지혜를 지녔다

잔가지만큼 넓게 넓게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아름답다

허욕과 먼지 많은 세상을

간결히 지키고 서 있어 더욱 빛난다

무성한 이파리와 어여쁜 꽃을 가졌던

겨울 나무는 아름답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도

결코 가난하지 않은 자세를 그는 안다

그런 나무들이 모여 이룬 숲은 아름답다

오랜 세월 인간들이

그런 세상을 만들지 못해 더욱 아름답다 *

* 도종환시집[부드러운 직선]-창비

 

* 꽃나무  

꽃나무라고 늘 꽃 달고 있는 건 아니다

삼백예순닷새 중 꽃 피우고 있는 날보다

빈 가지로 있는 날이 훨씬 더 많다

행운목처럼 한 생에 겨우 몇번

꽃을 피우는 것들도 있다

겨울 안개를 들판 끝으로 쓸어내는

나무들을 바라보다

나무는 빈 가지만으로도 아름답고

나무 그 자체로 존귀한 것임을 생각한다

우리가 가까운 숲처럼 벗이 되어 주고

먼 산처럼 배경 되어주면

꽃 다시 피고 잎 무성해지겠지만

꼭 그런 가능성만으로 나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빈 몸 빈 줄기만으로도 나무는 아름다운 것이다

혼자만 버림받은 듯 바람 앞에 섰다고 엄살떨지 않고

꽃 피던 날의 기억으로 허세 부리지 않고

담담할 수 있어서 담백할 수 있어서

나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다

꽃나무라고 늘 꽃 달고 있는 게 아니라서

모든 나무들이 다 꽃 피우고 있는 게 아니라서 *

* 도종환시집[부드러운 직선]-창비

 

* 초록 꽃나무   

꽃피던 짧은 날들은 가고
나무는 다시 평범한 빛깔로
돌아와 있다
꽃을 피우지 못한 나무들과
나란히 서서
나무는 다시 똑같은 초록이다
조금만 떨어져서 보아도
꽃나무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된다
그렇게 함께 서서
비로소 여럿이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고
마을 뒷산으로 이어져
숲을 이룬다
꽃피던 날은 짧았지만
꽃 진 뒤의 날들은 오래도록
푸르고 깊다 *

* 도종환시집[슬픔의 뿌리]-실천문학사

 

* 자작나무 
자작나무처럼 나도 추운 데서 자랐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맑지만 창백한 모습이었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꽃은 제대로 피우지 못하면서
꿈의 키만 높게 키웠다
내가 자라던 곳에는 어려서부터 바람이 차게 불고
나이 들어서도 눈보라 심했다
그러나 눈보라 북서풍 아니었다면
곧고 맑은 나무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몸짓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외롭고 깊은 곳에 살면서도
혼자 있을 때보다 숲이 되어 있을 때
더 아름다운 나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 

* 도종환시집[슬픔의 뿌리]-실천문학사

 

* 정향나무  

물러나는가 싶더니 황사가 또 하늘을 덮습니다

세월 흘러도 늘 푸른 염결과 지조를 지닌 그대여

나는 그대가 이 봄에는 정향나무처럼

사람 사는 동네에도 뿌리내리기를 바랍니다

설한풍에도 변치 않던 그대 굳건함 믿는 만큼

훈풍 속에서 짙고 부드러운 정향나무처럼 살아도

그대 변치 않을 것임을 나는 믿습니다

소나무는 지나치게 우뚝하고 단호하여 근처에

다른 수목들이 함께 살기 힘겨워합니다

없는 듯 있으면서 강한 향기 지닌 정향나무는

사람의 마을에 내려와 먼지 속에 살면서도

저 있는 곳을 향기롭게 바꿀 줄 압니다

그런 나무처럼 당신도 낮고 깊은 향기로

사람들 사이에 꽃피기 바랍니다

지금 쓸쓸하고 허전하지만 우리가 그나마

여기까지 온 것은 그대들 때문임을 압니다

그대들이 골목골목 꽃피어 세상이 풍요롭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 속으로 내려온 철쭉도 민들레

조팝나무도 내심으론 다 기뻐할 것입니다 *

* 도종환시집[슬픔의 뿌리]-실천문학사

 

* 살구나무 아래서  

그해 봄 저는 살구꽃이 눈발처럼 떨어져 내리는 살구나무 아래 있었는데요 진보라 제비꽃 옆으로 떨어져 내리는 살구꽃잎을

손에 들고 살구꽃 향내에 취해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야 느낄 수 있는 살구꽃 향처럼 살다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낮은 곳으로 내리는 꽃잎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제게 남은 향기가 있다면 이 궁벽진 산기슭에 다 쏟아붓고 싶었는데요


고개를 돌리면 살구꽃잎보다 많은 아이들 얼굴 그 아이들과 함께 내 있는 곳도 천계나 무색계가 아닌 욕계의 언덕이어서

강을 건너는 방법을 일러주는 어려운 일말고 그저 물가에서 물장난이나 할 때가 많았는데요 쉬어버린 목청을

꽃바람에 식히며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있곤 했는데요


꽃 그늘 속에서 눈을 감고 생각해 보면 지나온 십여년이 꿈만 같아서 눈물도 바람도 흐르는 강물 같아서 지는 꽃잎이 고요하듯

그렇게 지난 세월도 고요해져서 몇 시간씩 무설전에나 든 것처럼 말없이 강 건너를 바라다 보고 있을 때도 있었는데요


아수라의 한복판에도 연꽃을 든 이가 나타나고 갈림길에 이를 때마다 길 물을 수 있는 초동목부를 만나

이제껏 길 잃지 않고 온 것이 한없이 다행스럽고 화택의 불길 속에서도 물보라 같은 아이들 웃음 만나

오늘 또 하루를 살았다는 생각으로 혼자 고마워하곤 했는데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인연들과 다시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되풀이하며 비탈진 언덕에

꽃을 심곤 했는데요 딱딱한 땅을 파고 심은 꽃씨들이 은은하고 깊은 업연으로 이어져 피어나길 바라며

눈발처럼 지는 살구꽃 나무 아래 서 있었는데요 * 

* 도종환시집[슬픔의 뿌리]-실천문학사

 

* 미루나무

혼자서는 저마다 가슴 아픈 옛일도

속가슴에 묻어 두고 달그늘에 감춰 두고

몰래 울던 눈물도 햇빛 아래 지워져

미루나무 위에는 구름만 가득하다

 

* 보리수나무
보리수나무 잎이 지고 있었습니다
아무 소리도 없이
당신은 말씀이 없으셔
사방은 적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뒷산 숲도 맞배지붕 위에 내려와
턱을 고이곤 먼 데 하늘을 바라볼 뿐
보리수나무 잎만 가끔씩 지고 있었습니다
범종 소리 사라진 쪽 바라보며
말이 없으신 당신을 쳐다보다
보리수 그늘 돌아나오는 저녁
쯧쯧, 번뇌의 속옷은 그냥 둔 채
겉옷만 갈아입고 싶어하다니
그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리수 열매가 짧게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 복숭아나무  

허영을 부리지 않는 나무에
좋은 열매가 열린다
지나치게 화려한 꽃을 피우는 일에
연연해하지 않는 나무에
실한 열매가 달린다
허약한 가지를 오직
하늘 쪽으로 세워올리는 일에만
매달리지 않고
낮은 곳에 있더라도
굵게 자라는 법을 일러주는 나무
가지 하나하나 튼튼하게 키우는 나무들이
때가 되면 알 굵은 과일을 낳는다
흙냄새 몸에 잔잔한 향기로 밸 만한 높이에
반짝이는 열매를 내어거는 복숭아나무 같은 *

* 도종환시집[부드러운 직선]-창비

 

* 가죽나무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

내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했지만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 꼬여 있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보잘것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마리 있으면

편안한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줄 수 없어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이 숲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볼품이 없는 나무라는 걸

내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한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른 게 있다면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누군가 내 몸의 가지 하나라도

필요로 하는 이 있으면 기꺼이 팔 한짝을

잘라 줄 마음 자세는 언제나 가지고 산다

부족한 내게 그것도 기쁨이겠기 때문이다 *

* 도종환시집[부드러운 직선]-창비

 

* 나뭇잎 꿈 
나뭇잎은 사월도 청명과 곡우 사이에
돋는 잎이 가장 맑다
연둣빛 잎 하나하나가 푸른 기쁨으로
흔들리고 경이로움으로 반짝인다
그런 나뭇잎들이 몽글몽글 돋아나며 새로워진 숲
그런 나무들이 모여 이루는 산은
어디를 옮겨놓아도 한 폭의 그림이다
혁명의 꿈을 접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버린 건 아니어서
새로운 세상이 온다면 꼭 사월 나뭇잎처럼
한순간에 세상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었으면 싶다
이 세상 모든 나무들이 가지마다 빛나는 창을 들어
대지를 덮었던 죽음의 장막을 걷어내고 환호하듯
우리도 실의와 낙망을 걷어내고
사월 나뭇잎처럼 손사래 쳤으면 좋겠다
풋풋한 가슴으로, 늘 새로 시작하는 나뭇잎의 마음으로 *

* 도종환시집[슬픔의 뿌리]-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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