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인차리 1~7 - 도종환

효림♡ 2009. 7. 8. 08:46

* 인차리 1 - 도종환  

돌아가라 돌아가라고 바람이 분다

우리 사는 한평생 눈물겹게 사랑하여

아름다운 꽃잎 몇 개 피우기도 하고

끌어안는 것마다 싱싱한 풀잎 되어

뼈마디 가슴 가득 죄어오는 날도 있으리라

새떼보다 높은 하늘로 날아오르기도 하고

더욱 어두운 곳으로 낙엽처럼 뿔뿔이 흩어지기도 하리라

그 위에 진눈깨비 오래도록 때리는 날도 있으리라

그렇게 살다 돌아가라 돌아가라고

네 마음 순한 자리 돌아가라고

바람이 분다 

 

* 인차리 2  

이 세상

마음놓고 이름을 불러나 보기로도

이 산 속이 제일 좋아

비 젖고

숫눈 쌓인 무덤가에

앉았노라면

바스스 바스스 묵은 갈잎 밟으며

누군가 오는 소리

가까운 곳에

무명치마 끌리는 소리

눈들어 올려보면

소나무 등걸 위에

날다람쥐 한 마리

구름 아래로 떨어지는 솔잎

먼 곳으로 가는

바람 몇 줄기 

 

* 인차리 3  

등불 흐리게 돋아오른 당신의 창 향해

떠나가는 배나 옛노래 따위를 부르면

노랫소리 끝으로 부엌문 안쪽이 열리며

당신이 강둑으로 포롱포롱 달려오던 때나

기다림으로 잠 안 오는 밤

별 하나 섬돌 위에 뚝 떨어져 구를 듯

잔돌 하나 창 밖에

몰래 소리를 내며 떨어져

당신의 손짓 쪽으로 나를 불러내가던 때처럼

당신 있는 이곳으로 올 때면

내가 노랫소리나 발자국소리로

당신을 불러내러 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오

바람에 쓸리는 풀잎처럼 발자국소리 귀기울이며

모두 듣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도 드오

홀로 남아 있음으로 해서 아직도 내가 당신 창 향해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는 것이요

그 소리 다 들어 알면서도 내색할 수 없어

걸어온 능선의 잎지고 눈쌓인 풍경

되감아 말며 돌아오는 발걸음 따라와선

밤새 문풍지를 흔들거나

감나무 밑을 서성이기도 하다가

새벽이면 도로 가서

그저 말없이 또 한세월을 떠안고

누워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오  

 

* 인차리 4  

벌판 한가운데 서면 소리들이 달려온다

심줄처럼 솟은 논두렁길로 줄지어 눈이 쌓이고

살아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울음소리들이 뚝뚝 내게 떨어진다

머리채를 풀어 던지고 쓰러져 누운

산맥을 향해 겨울벌판 질러가며

사랑한다 사랑한다던 말을 생각한다

시린 내 왼손으로 오른손 맞잡아 비비며

따뜻하게 살자던 그 말의 온기를 생각한다

그대가 몇 달씩 얼고 갈라져 터지던 땅으로 누웠을 때

벼 그루터기처럼 촘촘히 박혀 뽑히지 않는

단단한 뿌리로 나도 당신 속에 있고 싶었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소리 속으로 가고 있다

울면서 달려가고 있다 

 

* 인차리 5  

인차리를 돌아서 나올 때면

못다 이룬 사랑으로 당신이 내게

슬픔을 남기고 떠나갔듯

나 또한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슬픔을 남기고 떠나야 하는 때가 있음을 생각한다

사랑으로 인해 꽝꽝 얼어붙은 강물은

사랑이 아니고는 다시 풀리지 않으리라

오직 한번 사랑한 것만으로도 우리가

영원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확실히 살아 있는 것들이

이 세상엔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번은 꼭 다시 만나야 하는 그날

우리 서로 무릎을 꿇고 낯익은 눈물 닦아주며

기쁨과 서러움으로 조용히 손 잡아야 할

그때까지의 우리의 사랑을 생각하는 때문이다 

 

* 인차리 6  

당신 곁을 돌아서자 눈발이 쳤다

처음엔 눈보다 바람이 더 섞여 날리더니

먼 데 산부터 조금씩 지우며 다가와

너와지붕을 감추고 산창의 등불 돋우더니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덮으며 하늘이 내려왔다

당신 앞에 무릎을 꿇 때마다 패인 자국

풀리는 날에도 녹지 않고 땅에 엉겨 있더니

오늘 밤 내리는 눈에 다시 지워지겠구나

어느 날엔 그것들도 모두 녹아 당신 살 가까이 스미고

무덤 위에 시든 풀들 일으키고

해 가고 달 가고 세월도 수없이 흐르며 가련만

해가 바뀌어도 슬픔은 줄지 않았다 

 

* 인차리 7  

육신을 누이고 밤이면 나의 마음도

몸을 빠져 무수한 곳을 떠다닌다

당신도 그렇게 떠돌다 오는가

내게도 가끔씩 다녀가는가

변함없이 놓여 있는 가구들도 둘러보고

거울 앞에 앉아 빗질도 해보고

방은 따스한가 손도 넣어보는가

아이들 잠자리도 둘러보는가

새도록 함께 걸어도 새벽이 빠르던

버드나무 강둑길 걸어도 보고

젖은 풀 위에 나란히 앉아 듣던

저녁 냇물 소리 들어보기도 하는가

옮겨 다니던 집들의 방문도 건드려보고

빨래를 가지런히 널던 빨랫줄 아래에도 서보는가

거기 서서 옛날처럼 손도 흔들어보는가

나는 오늘도 걸어서 당신 있는 곳까지 다녀왔다

내가 당신에게 오늘 남긴 말들 듣고 있었는가

혼미한 잠 속에 간간이 찾아와선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머물다 돌아가는 사람아 *

 

* 도종환시집[접시꽃 당신]-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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