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벗에게 부탁함 - 정호승
벗이여
소가 가죽을 남겨 쇠가죽 구두를 만들듯
내가 죽으면 내 가죽으로 구두 한 켤레 만들어
어느 가난한 아버지가 평생 걸어가고 싶었으나
두려워 갈 수 없었던 길을 걸어가게 해다오
벗이여
내 가죽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으로 가죽소파 하나 만들어
저녁마다 독거노인이 소파에 앉아
드라마를 보다가 울다가 웃다가 잠들게 해다오
그리하여 벗이여
내게 아직도 부드럽고 따뜻한 가죽이 남아 있다면
가죽장갑도 한 켤레 만들어
외로운 골목
추워 떠는 노숙의 손들이 낄 수 있는 장갑이 되게 하고
그러고도 내게 아직 가죽이 남아 있다면
별빛을 조금 섞어
써도 써도 만원짜리 지폐 몇장은 늘 들어있는
가죽지갑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의 가슴마다 빛나게 해다오
* 정호승시집[포옹]-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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