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허물 - 정호승

효림♡ 2009. 7. 22. 07:48

* 허물 - 정호승

 

느티나무 둥치에 매미 허물이 붙어 있다

바람이 불어도 꼼작도 하지 않고 착 달라붙어 있다

나는 허물을 떼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죽어 있는 줄 알았던 허물이 갑자기 몸에 힘을 주었다

내가 힘을 주면 줄수록 허물의 발이 느티나무에 더 착 달라붙었다

허물은 허물을 벗고 날아간 어린 매미를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허물이 없으면 매미의 노래도 사라진다고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허물의 힘에 놀라

슬며시 손을 떼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보았다

팔순의 어머니가 무릎을 곧추세우고 걸레가 되어 마루를 닦는다

어머니는 나의 허물이다

어머니가 안간힘을 쓰며 아직 느티나무 둥치에 붙어 있는 까닭은

아들이라는 매미 때문이다
 

* 정호승시집[포옹]-창비 

 

* 얼굴 - 정호승

 

어스름 깔린 저녁

맛좋은 고등어 있어요

눈을 끔뻑끔뻑 하는 싱싱한 고등어 있어요

생선장사 아저씨가 소리치며 골목 지나간다

부엌에 있던 엄마가 급히 대문을 열고 나가

고등어 한 마리를 산다

나는 내 방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고

고등어장사 아저씨한테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

고등어 얼굴 예쁜 걸로 주세요 

 

* 종착역 - 정호승 

 

종착역에 내리면 술집이 있다

바다가 보이는 푸른 술집이 있다

술집의 벽에는

고래 한 마리 수평선 위로 치솟아오른다

사람들은 기차에서 내리지 않고

종착역이 출발역이 되기를 평생 기다린다

나는 가방을 들고 기차에서 내려

술집의 벽에 그려진 향유고래와 술을 마신다

매일 죽는게 사는 것이라고

필요한 것은 하고 원하는 것은 하지 말라고

고래가 잔을 건넬 때마다 술에 취한다

풀잎 끝에 앉아 있어야 아침이슬이 아름답듯이

고래 한 마리 수평선 끝으로 치솟아올라야

바다가 아름답듯이

기차도 종착역에 도착해야 아름답다

사람도 종착역에 내려야 아름답다 

 

* 정호승시집[여행]-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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