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겨울, 채송화씨 - 김용택

효림♡ 2009. 8. 18. 09:09

 

* 겨울, 채송화씨  김용택

           

아내는 나를 시골 집에다 내려놓고 차를 가지고 돌아갔다

 

갑자기, 가야 할 길과

 

걸어야 할 내 두 발이

 

흙 위에 가지런히

 

남는다

어머니 혼자 사시는 우리집 마당에 발길 닿지 않는 땅이 이렇게 많이 있다니?

가만가만 돌아다니며 마당 가득 발자국을 꾹꾹 찍어본다

이 마당에서 벌거벗고 뛰어 놀던 내 형제들과 이웃 아이들의 벌거벗은 웃음 웃음소리 대신
어머니는 해마다 발 디딜 곳 없이 마당 가득 화려한 채송화를 피워놓는다
정말 환하다. 달빛은 환해서 세상의 모든 욕망을 죽이고 나무만을 따로따로 달빛 아래 세운다
달빛은 모든 것들을 떼어놓고 너희들의 말이 거짓이었음을 그렇게 보여준다

물만 흐를 줄 안다. 발 밑에서 참지 못하고 깔깔대는 까만 채송화씨들이

세상을 걷느라 두꺼워진 내 발바닥 깊은 속살에 닿는다

살아있는 씨가 세상의 정곡을 찌른다
나는 이 세상 모든 길들을 거둔다
세상의 소식이 닿지 않는 이 간단 명료한 사랑을 나는 알고 있다 
사랑이 아름다운 현실이다
이 세상 모든 살 구멍이 열리고 뼈마디가 허물어져내리는 사랑을 나는 안다
시를 써야지. 자고 일어나고 밥 먹고 일하는 사람들의 하루가 꽃이 된다
칠십 평생 고된 노동으로 이룬 따뜻한 어머니의 잠 속으로 들어가 자고 싶다
어머니의 깊은 잠만이 나를 새로 깨울 꽃이다
수백 수천 대의 자동차 바퀴 구르는 소리에 깔려 잠을 자던 내가

창호지 문지방에서 꼬물거리는 겨울 벌레 소리에도
눈을 뜬다
낡은 내 몸
어디에
새로
뚫릴
귀와
눈이 있었던가

나는 깨끗하게 죽을 것이다. 내 죽었다가, 수백 번도 더 죽었다가 살아났던

내 청춘의 오래된 이 방에서 나는 오랜만에 달빛으로 맞아 죽는다
저 황량한 거리, 재활용이 불가능한, 쓰레기 같은 모든 거짓 사랑속에서

미련 없이 걸어나와 누구도 닿지 않는 먼 잠을 자리
저 물소리 끝까지 따라가 잠자는 겨울 채송화씨, 그 끝에서 나는 자고 깨어
그리운 우리집 마당으로 꽃이 아니면 다시 오지 않으리

꽃이 아니면 나는 나를 이 세상에 허락하지 않으리

오, 죽지 않고 사는 것은 거짓뿐이니. 너를 따라온 모든 낡은 길들을 거두어라

 

* 김용택시집[나무]-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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