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구이 - 김용택

효림♡ 2009. 8. 27. 08:22

* 구이 - 김용택

 

산자락마다 꽃들이 흐드러집니다 

다가가서 바라보면 어지럽고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면 아찔합니다. 까만 가지 끝에 핀 꽃일수록

아슬아슬 더 붉고 꽃빛은 숨이 턱에 찹니다. 이러다가 자지러지겠어요. 이러다가는 저 꽃이 생사람 잡겠어요

저 꽃빛에 홀려 따라가다가는 숨넘어가겠어요. 아니, 내가 시방 홀렸지요. 제정신이 아니지요

이러다가 저 아리아리한 저 꽃빛에 캄캄하게 눈멀겠어요. 어찌하여, 어쩌자고, 이 시절 저 땅이 저렇게

도화살로 사람 죽이는 무릉도원인지. 환장하겠네요

 

내 숨결은 단내가 나고

내 손은 지금 땀이 찹니다

 

평화동 사거리에 나는 서 있습니다

바람은 어디서 오는지

바람이 불자 치맛자락이 살짝 흔들리고 당신의 희고 고운 손이 꽃가지처럼 살짝 드러났습니다

산그늘 속에서 연분홍 꽃잎들이 당신을 향해 후루루 날아옵니다. 당신은 몸을 수그리고 얼른 치맛단을

잡아올려 꽃잎을 받습니다. 치마폭 깊이 소복하게 쌓인 꽃잎들, 환하게 웃는 당신, 오! 꽃빛을 받은 그대 고운 얼굴

무엇을 보았는지 당신은 화들짝 놀라며 치마폭을 놓아버렸습니다. 꽃잎들이 땅에 닿기 전에 후후후

날아올랐습니다. 당신도 꽃잎을 따라 그렇게 날아올라 산으로 갔습니다

 

산그늘 속 아슬아슬한 절벽에 한 그루 산복숭아나무꽃이 만개하고 있습니다

한겹 또 한겹, 산이 환하게 개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나는 모릅니다. 당신이 보고 놀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모릅니다

모르는데도, 모른다고 해도 꽃은 핍니다

 

구이(九耳)

나는 지금 꽃피는 구이로 갑니다 *

 

* 김용택시집[수양버들]-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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